진천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의 탄생지는 1983년 정화되어 생가를 복원하여 놓았으며, 유허비가 보호각 안에 있다.

진천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사적 제414호)
鎭川金庾信誕生址─胎室

흥무왕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만노군 (萬弩郡, 진천의 옛이름)에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 장군, 어머니는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萬明)이며, 진평왕 17년(595년)에 이곳 진천읍 상계리 계양(桂陽)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鉉)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 그리고 큰 담을 쳤다 하여 담안밭(장군터)이라 불린다. 또한 뒷산에 태실과 태령산성 등 신라 시대의 유적이 있다.


                                김유신 장군과 유허비


                              김유신 장군 탄생지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의 탄생지는 1983년 정화되어 생가를 복원하여 놓았으며, 유허비가 보호각 안에 있다. 재실은 정면 4칸, 옆면 1칸반의 팔작 지붕목조기와집으로 앞의 반칸에 마루를 놓았다. 유허비는 거북대좌 위에 오석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으며, 비제는 ‘흥무대왕김유신적허비'로 비문은 육당 최남선이 짓고 글씨는 시암 배길기가 썼으며 1983년에 세웠다. 1988년 9월 30일에 ‘김유신장군유허지(金庾信將軍遺墟址)’라는 명칭으로, 1997년 6월 27일에 태실은 ‘김유신 태실및 돌담’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유허지 일대에는 김유신 장군 태실, 태령산성(胎靈山城), 연보정(蓮寶井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김유신 장군 탄생지, 김유신 장군 사당인 길상사(吉祥祠), 사곡리장수굴(沙谷里將帥窟), 화랑벌, 병무관(兵武館),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마대, 쏠고개, 당고개, 말탄터 등 김유신과 관련된 사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김유신 장군 탄생지와 태실 두 곳 232,814㎡을 1999년 6월 11일에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진평왕51) 중당(幢)의 당주(幢主)로써 낭비성(지금의 청주시 남성)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했고 압량주(押梁主) 군주가 되었다. 644년(선덕여왕13)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에 오르고 백제군과 싸워 이겼으며 647년(진덕여왕1) 반역을 꾀하는 비담(毗曇) 염종(鹽種)의 반군을 토벌한,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物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진덕여왕2) 백제의 대량주(大梁州)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 이찬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고 654년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泗泌城)을 함락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追尊)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길상사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진천에는 길상사(吉祥祠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가 세워져 영정을 봉안, 제향을 지내고 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이후 태령산 아래 사당을 짓고 국가에서 향과 축을 내려 봄과 가을로 국행제(國行祭)를 지내오다가 조선 초기부터 관행제(官行祭)를지냈다. 그 후 임진·병자 양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1926년에 현재의 위치인 벽암리 도당산(道堂山)안에 길상사를 재건하였으며,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연보정


현재 연보정의 서쪽인 완만한 평탄대지에 자연석을 이용해 3∼5열로 구축한 3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연보정은 김서현이 만노군의 태수로 있을 때, 치소에서 사용하던 우물로 전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석축을 돌려 쌓았으며, 샘의 직경은 1.8m, 후면의 높은 쪽은 2.6m나 되는 곳도 있다. 특히 연보정은 4m정도 수로를 전면에 내고 있어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으며, 수로 좌우측에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남아 있다. 이 우물은 김유신 장군과의 관련뿐만 아니라, 축조방식이 자연석을 이용한 고식(古式)인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태실


태실은 탄생지 뒷산인 태령산성의 정상부에 있다. 태실은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덮은 봉분형의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의 형태이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했으며, 태령산 정상을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돌려 신령한 구역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곳 주위의 석축 형태가 태아(胎兒)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산의 지세를 따랐다기보다는 신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김유신 장군과 관련해 신앙적인 면과 반월(半月) 형태인 것으로 고대 농경사회에 있어서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한 곡령신앙(穀靈信仰)과 연관 지을 수가 있겠다. 현존하는 석축의 높이가 약 1.2∼1.8m이고, 직경 약 9m의 타원형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태실 중앙에 1986년도에 보수한 직경 3m, 높이 35㎝의 원형 석단이 있어 잔디를 씌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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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