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 5

악명 떨치던 간도 일본 순사 사살한 새벽 총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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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떨치던 간도 일본 순사 사살한 새벽 총격전

국가보훈처, 일제강점기 만주서 군자금 모집 별동대 ‘국민부 모연대’ 문건 최초공개
1929년 간도 총영사관 경찰서 작성 문서,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독립유공자·운동사 밝힐 사료 발굴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8일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최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인 국민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북간도로 파견했던 모연대(模捐隊)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고 밝혔다.

간도지역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독립군은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등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1920년 간도지역 한인을 대거 학살한 간도참변을 일으키면서 독립군은 지지기반을 잃고 무장투쟁 자금을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당시 남만주를 일대로 무장투쟁을 수행하던 국민부는 설립 직후인 1929년 5월에 북간도에서 친일 부호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할 별동대로 모연대를 조직했다. 모연대를 통해 모집된 군자금은 국민부의 군대인 조선혁명대의 무기 구매와 의식주 해결 등 군수보급 비용으로 사용됐다.

                                           모연대 조직도 / 사진제공=국가보훈처



‘국민부’는 1929년 4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일부가 통합하여 설립한 단체로, 창립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재만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일종의 자치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해당 자료는 보훈처가 올해 4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독립운동 관계자료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것으로, 1929년 12월 6일 간도 총영사관 경찰서장이 간도 총영사에게 국민부 모연대에 대한 수사 경과를 보고한 11쪽짜리 기밀문서이다.


1929년 5월~11월 국민부 모연대(대장 장한성)의 군자금 모집 상황표-1929년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장한성이 이끄는 국민부 모연대가 중국 연길에서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등을 표방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출동한 횟수와 금액이 기록되어 있다. 총 22차례에 걸쳐 4,156원을 모집하였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4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자료출처= 국가보훈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자료에서 일본경찰은 그들이 파악한 모연대의 조직체계, 군자금 모집방법, 모연대원의 인적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 당시 비밀리에 활동했던 모연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군자금 모집 상황표’에는 모연대가 다녀간 지역, 방문횟수 및 인원, 납부명령 금액 및 실제 모집액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문서의 마지막에는 검거대상인 모연대원 등 일본경찰이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분류한 39명의 명단을 첨부하였는데, 현재까지 포상되지 않은 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을 위한 공적 확인에 유의미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모연대원 등 당시 일경이 불량선인으로 분류한 인명-간도총영사관 경찰서가 별도 추격대를 편성하여 검거하려 했던 모연대원 등의 명단이다. 이명, 나이뿐 아니라 “눈이 둥글고 중간 정도 몸집”, “서양풍이 강한 인텔리에 조선 의복 착용”과 같은 외모적 특징, “사격에 능함”과 같은 재능도 간략하게 적어놓은 점이 주목할만하다. 자료출처= 국가보훈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또한, 자료에는 장한성이 이끄는 모연대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경찰이 작성한 행동경로, 부대편성, 수색전략 등 세밀한 체포작전(쓰보이 사살 사건 포함)과 함께 야간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펼쳐진 일본경찰과 모연대원의 긴박한 대치상황이 시간대별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쓰보이 사살 사건’은 간도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지휘관 쓰보이 미요지를 중심으로 모연대 체포를 위해 추격대를 편성했는데, 1929년 11월 30일 새벽, 쓰보이는 밀정에게 사전 보고 받은 내용을 근거로 장한성이 평소 자주 찾는 요리점으로 가던 도중 장한성과 맞닥뜨렸다. 총격전 도중 장한성이 쓰보이에게 발사한 모제르 권총 두 발이 무릎과 이마를 명중, 쓰보이가 사망한 사건이다.

쓰보이는 1928년 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70여명을 체포해 독립군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던 일본 경찰이었다. 일본 경찰들이 총을 쏘며 장 대장을 추격 했지만 체포는 실패했다. 장 대장의 쓰보이 사살 사건은 일제와 한국인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동아일보 1929년 12월7일치에 보도됐고, 그의 신병 인도를 둘러싼 문제는 중국과 일본 사이 간도 지역 내 한국인 관할권에 대한 외교 쟁점으로 부각했다. 1930년 2월, 일제의 강력한 항의로 장 대장은 결국 중국 치안당국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중국 길림에서 옥중순국 했다. 장 대장은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중외일보1930년 2월24일자에 실린 장한성 선생 사진과 일제 경찰 쓰보이미요지 사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9년 12월7일자, 길림에서 체포된 사건(조선신문) 등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이다. 장한성의 이력과 국민부 모연대에 대한 단편적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제공

보훈처는 “일제강점기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군자금 을 모집한 단체의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는 문서가 처음 공개된 것”이라며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은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이 자료가 치열했던 만주독립운동 의 실상을 제대로 밝혀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채영국 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남만주를 무대로 활동한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 인 국민부의 무장활동이 북간도에서 끊이지 않고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료”라고 말했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번에 보훈처가 수집한 문서는 장한성 선생의 쓰보이사살 사건 직후에 작성된 가공되지 않은 원문”이라며 “국민부 모연대장으로 활동한 장 선생의 치열한 전투, 그가 속했던 국민부 모연대의 활동 등은 새롭게 연구되고 재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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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