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 보훈의 달 3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 서울탈환, 그리고 10월 3일 의정부 탈환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된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 등)이 북한군 서울지구방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격퇴한 작전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3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1980년 9월 15일 옛 격전지를 굽어보는 이곳 인천 수봉공원에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원래는 상륙기념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2017년 10월 11일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 수호를 위해 희생, 공헌하신 인천 6.25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명비를 건립하면서 '6.25참전 인천지구전적비'로 명칭이 바뀌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 서울탈환, 그리고 10월 3일 의정부 탈환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된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 등)이 북한군 서울지구방위사령부 예하 부대들을 격퇴한 작전이다.

크로마이트(Cromite) 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상륙계획은 목표가 인천이라는 점에서 계획 초반부터 미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한 미 해군의 상륙작전 전문가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논란을 거듭하였다. 그란 맥아더 장군은 이들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인 인천의 자연적 장애 요소를 역으로 인천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소신으로 이를 관철하였다. 유엔 해군과 공군은 9월 7일부터 14일까지 동해와 서해에서 양동작전을 펼쳤으며, 이 기간에 유엔 공군은 총 3,250여 회나 출격하여 전략·전술 표적을 강타하였다.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유엔 해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사단 등 7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02:00시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 북한군의 저항은 미약하였다. 다음날 새벽 미 제10군단은 인천 일대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소탕한 수 18일에는 김포공항을 탈환하고 영등포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19일 서울 탈환작전으로 전환한 미 제10군단은 행주-능곡-연희동, 영등포-마포, 노량진-서빙고-남산 등 3개 방면에서 서울로 진출하여 시가전을 치른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일부 부대는 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26일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 진격한 미 제1군단 선발대와 연결하게 되었다.

9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 사령관이 임석한 가운데 서울 수복을 경축하는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한국정부는 이날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낙동강전선에 집중 투입된 북한군의 주력을 포위할 수 있게 되었고 개전이 이후 수세일변도의 방어 작전에서 벗어나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세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 작전은 또한 유엔과 자유우방국가들이 38도선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상태를 타파하고 통일의 실현을 위한 유엔군의 군사작전을 지지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한 의미있는 작전이였다.

한국군으로 역사적인 이 작전에 참가한 지상군은 제1해병연대와 육군 제17연대였다. 제1해병연대는 제주도에서 약 3,000명의 신병을 모집하고 또한 김성은 부대 2개 중대로 보강하여 1개 연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9월 6일 부산에 집결한 다음 미 제5해병연대와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위한 단기간의 특수훈련을 받고 9월 11일까지 모든 출동준비를 완료하였다.

육군 제17연대는 수도사단 예하이며 안강, 기계 방면에서 전투 중이었으나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다. 제17연대는 수도사단에서 배속해제되고 육본직할이 되었으며 9월 14일부터 양일간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상의 부대 외에도 각급 미군부대에는 통역, 정보 및 기타의 특수분야에서 상당수의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이 활동하였다. 화랑부대라고도 호칭되던 전투경찰대가 미군부대에 배속되었다. 미 제1임시해병여단에는 낙동강전선에서부터 100여 명 규모의 1개 전투경찰중대가 배속되었으며, 미 제7사단에는 한국군이 충원되던 시기에 100여 명의 전투경찰중대가 3개 보병연대에 각각 배속되어 훈련을 받은 뒤 작전에 참가하였다.  자료 남구학산문화원

인천광역시 수봉공원 내 위치한 인천지구전적비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국군과 유엔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1980년 9월 15일 수봉공원에 건립되었다.




                      인천맥아더장군동상과    맥아더 장군 흉부상(사진출처: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 모습(사진출처:국가기록원)


 2016년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된 군사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이재한 감독의 영화이다. 양창훈 제작, 이만희각본, 이정재, 이범수, 리암 니슨, 진세연, 정준호 등이 

출연했다.


          참전 유공자 명비   6.25 참전유공자 명비는 그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육군 1만6321명,

          해군 976명, 해병 465명, 공군 254명, 경찰 797명 등  1만9334명이다.


6.25 전쟁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의용병을 학도의용군이라고 하는데, 일본까지 6.25 전쟁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동포의 자녀 및 유학생들은 당시 병역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용군을 조직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전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건의문을 제출했다. 이 중 일부는 미 제1기병사단과 제3사단에 편입되여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280명은 인천상륙작전 다음날 UN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했고, 나머지 361명도 참전하여 총 641명의 학도병이 전투에 참여해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재일학도의용군의 뜻을 기리고 표본으로 남기고자 이 탑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9월 하순 기념행사를 한다.


                 1984년 9월 인천시와 국방부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세운 기념관이다.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는 암호명으로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주도하였으며, 전쟁 전반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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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