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곤여만국전도와 보물 혼개통헌의

새 시대를 위한 개혁과 개방의 정신을 깨우치다 보물 곤여만국전도와 보물 혼개통헌의

 조선 후기 실학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서양 과학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 요청에 부응한 학문으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라는 낡은 시대의 자폐적인 정신 상황을 반성하는 한편,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학문의 사명으로 삼았다. 17세기 중엽 명·청(明淸) 교체에 따른 화이(華夷) 질서의 해체는 실학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이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서양 천문학과 세계지도로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 문물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지녔던 지식인들에게 수많은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물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 1602년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와 명나라 학자 이지조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 萬國全圖)〉의

           수정본인 〈회입(繪入)곤여만 국전도〉를 숙종 34년 (1708) 조선의 관상감에서 모사하여 제작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서양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싹틔운 곤여만국전도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 사행(使行)이 빈번해 지면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坤輿 萬國全圖)〉 같은 서양식 세계지도가 전래되었다. 여기서 ‘곤여’는 지구의 별칭으로 곤여만국전도는 당시 동양의 지식인에게 서양의 지리학과 지도의 제작 수준, 서양 세계의 정확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시각적으로 알려주고, 동양의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던 종래의 세계관이나 화이관에 자극과 충격을 주었다.

그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었으나 서구식 지도와 그에 수반된 세계관의 탐색은 당시 사변화되고 형식화되어 갔던 주자학(朱子學)에 치우쳐 있던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한 모색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붕괴되어 갔고, 이를 타개하고자 발흥한 18세기 실학은 서양 지도와 지리학, 서양세계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곤여만국전도〉는 숙종 34년(1708) 어명에 따라 관상감 이국췌(李國萃) 와 유우창(柳遇昌)의 주도하에 당대 이름난 화가인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8폭 병풍으로 여러 다른 지도를 참조해 그린 채색모회본(彩色摹繪本)이다. 지도의 여백에 당시 범선과 어류, 이상한 동물 등을 그려 넣은 이른바 <회입(繪入)곤여만국전도>이다. 6·25전쟁 때 소실된 봉선사 본도 이때 제작된 것이고, 이와 동일한 지도가 일본 오사카의 남만문화관(南蠻文化館)에도 있다고 한다. 실학박물관에서는 2011년 6·25전쟁 때 없어진 봉선사본을 흑백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서양의 한 선교사가 편찬·간행한 세계지도는 중국은 물론이고 주변국인 조선과 일본 에도 전해지면서 중국 외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그러면서 세계 지식의 계몽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더욱이 그가 지도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지명과 지리용어를 한자로 번역했는데 그에 따른 지리용어가 한자로 표기되는 최초의 기록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일상 적으로 쓰고 있는 ‘지구(地球)’가 그렇고, 경위선(經緯線), 적도(赤道), 회귀선(回歸線)도 그의 지도에서 생겨난 용어이다.

                   02.보물 혼개통헌의 (渾蓋通憲儀). 동양의 전통 우주론인 혼천설(渾天說)과 개천설(開天說)을 하나의 원판형 의기 (儀器)에 통합해

                   표현한  천문시계이다.  ©실학박물관    03.유금의 인장이 새겨진 혼개통헌의 고리 부분 ©실학박물관



새로운 천문관을 심어준 새로운 천문의기

곤여만국전도와 더불어 마테오 리치가 동양 사회에 전파한 서양 과학 문물 중에는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가 있다. 혼개통헌의의 원명은 아스트로라베(Astrolabe)이다. 아스트로라베로 불리는 휴대용 천문기기는 유럽에서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가장 정확하고 휴대하기 간편 한 최고의 천문의기였다. 이것이 마테오 리치에게 학문을 배운 명나라 관료 이지조가 ‘혼개통헌의’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며 1607년부터 명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알려 지기 시작했다.

혼개통헌의는 3차원의 구면 천체를 평면에 옮겨 놓은 것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지원설과 함께 동아시아에 새로운 천문관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스트로라베로 불리는 혼개통헌의는 14세기 기계시계가 고안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여행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천문시계였다. 해와 별이 뜨는 시간과 지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고, 미래나 과거의 어느 날짜에 천체의 정렬 상태도 알아낼 수 있게 고안되었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시대 라고 전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슬람 문화에서이다. 아스트로라베가 이슬람에서 발전한 것은 세상 어느곳에 있든지 메카를 향하여 정확한 시간에 매일 5번의 기도를 해야 하는 이슬람 종교의례와 관련이 깊다. 유럽에서는 11세기를 전후로 항해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파되었다.

                   봉선사에서 소장중인 조선 숙종 어람본 곤여 만국전도. 실학박물관은 2011년, 6·25전쟁 때 소실된 숙종 어람본 곤여만국전도를

                   복원해 62년 만에 원래 소장처인 경기 남양주 봉선사에 전달했다. ©실학박물관



동아시아 사람이 제작한 유일한 아스트로라베 유금의 보물 혼개통헌의

이 혼개통헌의를 직접 한양의 위도에 맞춰 제작한 조선인이 있었다. 북학파 실학자로 알려진 유금(柳琴)이다. 유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학문과 예술을 즐기며 벗들과 교유했다.

유금은 거문고를 좋아해 자를 탄소(彈素)라 하고 원래 이름이 유련이었으나 이 이름 대신 거문고 금(琴)자를 써서 유금으로 개명했다. ‘탄소’는 ‘탄소금(彈素琴)’의 준말로 소금을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이름에서 보듯 거문고를 매우 사랑한 인물로 음악은 물론이고 인장을 새기는 데에도 재주가 있었고 수학과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유금은 북경 연행을 3번이나 다녀왔다. 서자 출신인 신분탓에 공식적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북경 연행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행에 다녀온 뒤, 그는 개명했고 서양 선교사들의 서적도 탐독했다. 그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와 이지조가 쓴 『혼개통헌도설』을 바탕으로 보물 혼개통헌의를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마테오 리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기독교 신앙을 정착시킨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이다.



보물 혼개통헌의의 앞면은 일종의 천문계산기이다. 앞면 에는 ‘레테(Rete)’로 불리는 구멍 뚫린 판이 있는데, 이것을 돌려가며 원반 아래에 새겨진 눈금선을 통해 천체 관측 값을 얻는다. 레테의 기본 뼈대에는 여러 개 ‘지성침(指星針)’이 있는데 조선시대 유금이 만든 혼개통헌의에는 모두 11개의 지성침이 있다. 유럽에는 지성침이 40개나 되는 아스트로라베도 있다. 이들 지성침은 특정의 밝은 별을 가리 키도록 맞추어져 있다. 유금의 혼개통헌의에는 규대(圭大), 즉 규수대성(Mirach), 필수대성, 삼좌견성을 비롯한 11개의 특정 별을 가리키도록 제작되어 있다.

유금의 보물 혼개통헌의는 한중일 동아시아를 통틀어 동아시아 사람이 제작한 것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혼개통헌의다.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서양 과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하는데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정성희(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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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