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게도 아름다운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역사성과 연계된 유적으로 道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아프게도 아름다운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188호 (2013.2.14.)

갈매못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프랑서 신부 3명을 비롯한 다섯 성인이 순교한 성지로, 1925년 공주 최말구 신부 등이 답사를 통해서 순교지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고, 치명터 20평을 매입하여 성지개발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이후 순교자들의 복자품(1968년), 성인품(1984년)으로 인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갈매못 성지도 함께 정비되어 현재 갈매못 성지는 약 5천500여 평의 대지 위에 순교자기념비, 기념관, 사제관, 수녀원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한해 약4~5만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전국적인 명성이 있는 순교성지이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역사성과 연계된 유적으로 道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갈매못 성지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해 있으며, 보령시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오천면은 20여 개의 유인도와 48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다. 오천(鰲川)은 자라 오자(鰲)에 내천(川) 자가 어우러진 이름이다. 즉, ‘오천’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영보리의 영보(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다는 뜻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이다.

오천항은 바다 양쪽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또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해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서해안의 천혜의 항구다. 오천항은 이미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항구로 이용되었으며, 통일 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항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로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군선이 머물렀던 곳이다. 오천에 수영(水營)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지키는 3개의 수영이 있었다. 충무의 경상 수영, 여수의 전라 수영, 오천의 충청 수영이다. 각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상주시켰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함께 있었다.

오천에는 조선 태조 5년(1405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자리하면서 처음으로 군영이 설치되었고, 중종 4년(1509년)에 서해안 방어 기지로 쌓기 시작한 오천성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높이 3m, 길이가 3,000m나 되는 오천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정3품관의 수도절도사가 상주하였다. 오천항은 군선 100여 척이 정박하고, 수군도 3,000명이 항상 주둔하였던 군항이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충청 수군절도사가 주둔했던 장교청 건물과 진휼청만 남아 있다.

샤를 달래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갈매못 성지를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형장은 바로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다. 대원군이 이 자리를 처형장으로 택한 것은 명성황후의 국혼이 예정된 시기로서 수도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해야 탈이 없으리라는 무당의 예언도 있었고,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가 침략을 시도한 서해의 외연도가 아스라히 바라다보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던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 오메르트(Auma tre 吳), 위앵(Huin, 閔)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黃錫斗, 루가)와 회장이요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張周基, 요셉)등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은 5명과 그 밖의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로 물든(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 순교한 처형장이었다.

이중 다블뤼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보좌 주교로 성성 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르트 신부와 위앵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두세 차례 신문을 받고 3월 23(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堤川)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도 신문을 받고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황석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洪山) 남포의 서들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Blanc) 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 서울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한편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갈매못 순교터는 1975년 9월 대천 본당 주임으로 있던 정용택(鄭鏞澤, 요한) 신부에 의해 확인되어 그 자리에 순교비가 건립되었다.

인근의 오천성은 좌수영 및 우수영과 함께 영향력 있었던 충청수영이 있던 곳으로서 다른 지방과 다르게 전국의 죄인들이 여기까지 와서 처형당하기도 했던 역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1927년부터 이곳이 치명터임이 확인되어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했고, 1975년에 순교비가, 1999년 경당이 완공되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전래적으로 무서운 곳으로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누구도 이 근처에 가지 말도록 해왔던 이곳은 길도 없어 인근 오천성에서 배를 타고 오던 곳이었으나 성지로 개발되어 지금은 경당 앞 천수만변 도로를 통해 수많은 순례 단체가 줄을 이어 방문하고 있다. 단체 순례자들은 언제나 편리한 시간에 미사봉헌을 예약할 수 있으며, 매주 일요일 11시 30분에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을 성지로 만드십시요. 제가 성지 순례를 여러분 댁으로 가겠습니다." 하는 신부님의 설교는 순례자를 감동시킨다. 서해의 섬들과 천수만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은 순교 성인들의 피를 연상시키는 듯, 낙조가 의미심장하고 아름답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