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5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과 내륙을 연결하던 벽소령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5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과 내륙을 연결하던 벽소령길

벽소령(碧宵嶺)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와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해발 1,350m의 고갯길이다. 벽소령은 순우리말로 '푸른하늘재' 라는 뜻이다. 벽소(碧宵)라는 이름은 벽소한월(碧宵寒月)에서 유래하였는데 의미는 '겹겹이 쌓인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라는 의미이다. 벽소령에서 바라보는 달 풍경은 매우 아름다워 이를 벽소명월(碧霄明月)이라 하며 지리산 10경 중 제4경에 해당한다.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을 남북으로 넘나드는 중요한 고개 가운데 하나였다. 옛날에는 하동군 화개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였기 때문에 지방도 제1023호선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벽소령이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있어 자연보호를 위해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도로 또한 전혀 포장되어 있지 않다. 벽소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빨간 우체통이 있다. 2001년 7월 2일에 설치되었으며 벽소령 대피소에 교대 근무를 하는 직원들에 의해 산 밑 우체국으로 전달된다. 높은 산 위에 설치된 우체통이라는 의미 때문에 지리산을 종주하는 관광객들 사이에 유명하며, 심지어 직접 편지를 부치기도 한다.

       대동여지도(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영남지도와 광여도 등의 지도에서는 벽수령(碧愁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벽소령 옛길


지리산의 주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벽소령의 서남쪽 멀지 않은 곳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섬진강 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화개장터가 있다. 화개장터는 벽소령에서 내려오는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다. 애초에 벽소령 고갯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은 고개 주변에 살던 사람들과 등짐을 진 보부상, 그리고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사찰이나 암자의 스님들이었을 것이다.

벽소령을 넘는 옛길은 소금길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고개는 경상남도 함양 사람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남해안의 수산물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특히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 유통되던 길이었다. 남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은 섬진강을 거슬러 와 지리산의 화개재, 벽소령, 장터목 등 3대 고개를 넘어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등지로 흘러 들어갔다. 경상남도의 내륙과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지리산에 소금쟁이묘 또는 소금쟁이능선 등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소금을 가지고 다니던 소금장수가 지리산을 넘나들었음을 보여준다. 소금쟁이능선은 함양군 마천면의 음정 마을 근처에 지정된 자연휴양림에 있는 능선을 가리킨다. 이 능선은 벽소령을 오가는 산길의 일부 구간이다. 남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이 섬진강을 따라 화개나루까지 온 다음 화개에서 신흥 마을과 의신 마을을 지나 벽소령을 넘어 소금쟁이능선을 따라 마천면으로 운송되었다. 보통은 산길을 넘을 때 능선 보다는 골짜기를 선호하지만, 벽소령에서 마천 방면으로는 능선길을 따라 간 점이 다른 지방의 산길과 가지는 차이점이다.

벽소령을 넘어 소금을 구하러 다닌 사람은 경상남도 함양 사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사람들은 남원시 산내면과 함양군 마천면과 경계를 이루는 빗기재를 넘어 마천면을 지나 벽소령을 통과한 후 화개장이나 하동장에서 소금을 구입했다. 산내면 사람들은 벽소령보다 서쪽에 있는 화개재를 넘는 것이 화개장이나 하동장으로 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화개재를 이용하지 않고 빗기재와 벽소령이라는 두 개의 고개를 넘으면서 소금을 구하러 간 것은 일찍부터 화개재의 통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7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는 화개재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벽소령과 빗기재(橫峙)는 명칭이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벽소령 소금길의 곳곳에는 많은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그 가운데 오리촌이라 불리던 마을 사람들은 농업 대신 벽소령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술을 팔아먹고 살았다고 한다. 이 소금길의 마을이 사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1949년 정부에서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마을에서 내쫓았고, 근대 이데올로기의 처절한 싸움이 이곳에서 마무리 되기도 하였다. 한때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군사 도로를 만들다 중단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월은 흘러 힘들게 만든 군사 도로 축대도 무너지고 바위가 굴러떨어져 길을 막고 잡목과 산죽으로 우거진 쓸쓸한 옛길이 되어버렸다.


                                                                         무너진 군사 작전도로


산내면과 마천면은 군도 다르고 속해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다르지만 매우 친밀한 동네이다. 이들 두면은 임천이라는 물길과 그 옆으로 나 있는 국가지원지방도 제60호선을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의 지방도가 통과하는 구간은 오래전부터 소로가 나 있던 곳이다. 하천변을 따라 나 있던 평지를 이용하지 않고 산내면에서 빗기재를 넘어 마천을 경유해 소금을 구입하러 간 이야기는 산내면에 살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임천의 지류인 만수천이 흘러 내려오는 뱀사골쪽의 지리산 기슭에 있는 내령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빗기재를 넘어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