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2

아흔아홉 굽이를 돌던 진안의 곰티재길 결사항전의 그 곳, 웅치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2

아흔아홉 굽이를 돌던 진안의 곰티재길 결사항전의 그 곳, 웅치

전라북도를 동부 산간과 서부 평야로 구분하는 산줄기는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은 전라북도의 동부에 자리한 무주군·진안군·장수군을 품고 있다. 이들 3개 군은 ‘무진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의 동북 지역은 서쪽의 노령산맥을 경계로 해발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남한의 지붕인 진안고원을 이룬다. 진안고원은 주변 지역에 비해 고도가 높은 편이다. 진안에서 곰티재 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지만, 전주에서 곰티재로 오르는 길은 매우 험해 아흔아홉 굽이를 돌아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웅치일원 고지도(1872년)  1918년 지도/사진=완주군 제공


주변에 다른 고개가 있었지만, 곰티재가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곰티재의 남쪽으로 전주와 진안을 잇는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곰티재의 위치가 신작로의 정상부로 옮겨갔다. 곰티재 옛길을 포함한 조선 시대의 옛길은 아직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길을 대신한 일제강점기의 신작로, 근대에 개설된 길, 현대에 개설된 길이 모두 과거 곰티재 옛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곰티재 옛길의 바로 남쪽에는 익산포항고속도로가 2007년에 개통하면서 곰티터널이 뚫렸다.


                                                                                       옛 웅치길


                                                                              곰티재 신작로길                     


                                                                   익산-포항간 고속도로


곰티재 옛길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래 곰티재는 신작로 개설 이전부터 서해의 수산물이 육로를 따라 진안과 장수 등지로 이동하던 통로였다. 전라북도 군산의 옥구에서 소금을 짊어지고 호남평야와 전주를 거쳐 곰티재를 넘으면 진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안으로 진입한 일본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곰티재를 넘다가 우리 군사들과 웅치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고개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로부터 이 고개를 웅치(熊峙)라 불렀던 것을 보면 곰과 관련된 의미로 볼 수도 있고, 곰은 순우리말의 크다(大)를 의미한다는 데에서 큰 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죽을 각오로 맞서 싸우는 뜻을 가진 결사항전(決死抗戰)이란 말이 있다. 지금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조국을 지키겠다는 국민들의 결사항전을 지켜보며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낸 우리 백성들의 웅치 전투에서의 결사항전을 생각해 본다. 지금의 우리는 전염병의 긴 터널을 어렵게 지나고 있지만, 선조들이 지켜내고자 결사항전으로 염원했던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음력) 왜군 선발대가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왜군들이 쳐들어오며 마지막 방어선이라 여긴 탄금대마저 함락되자 선조는 4월 30일 피난길에 나섰고, 3일 후인 5월 3일 왜군 1진이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한다. 조선의 수도에 들어왔지만, 선조를 놓친 왜군은 그 뒤를 쫓으며 조선 팔도를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조선의 각 방향으로 쳐들어간다. 전라도 지배를 위해 전주성을 점령하려 이치와 웅치를 지나는 왜군에 대항하며 치러진 지역의 전투에 따라 웅치전투 이치전투라 칭했다. 그 중, 웅치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를 진격하려는 왜군에 대항하여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안덕원에 이르기까지 결사항전으로 저지하며 치열하게 싸운 전투이다.

웅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앞선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된다. 6월 말 왜군이 전라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안을 지나 웅치를 통해 전주 공격을 감행하고자 움직이자,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 화순)현감 황진,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등 관군이 배치되었고 정찰을 나선 황진이 왜군 선봉을 격퇴한다. 관군은 물론이고 3대 독자로 무과에 급제 후 시묘살이를 하다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한 의병장 황박을 비롯하여 진안의 선비 김수·김정 형제와 지역의 민초들이 의병으로 합류한다. 대략 1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왜군에 맞선 당시 조선군은 대략 왜군의 십 분의 일인 천여 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웅치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일대를 3개의 진으로 나누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전선 격인 산 아래의 제1 방어진지는 황박과 관군인 오정달이, 중턱의 제2 방어선은 이복남과 변응정이 맡았고, 정상부의 제3 방어선은 지휘부인 정담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조선군은 왜군에 결사항전으로 맞섰지만, 왜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무기의 열세로 1,2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후의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대부분 전사하였다.

선조수정실록(국보)에는 7월 7일 왜적의 선봉 수천 명에 대항하여 싸운 이복남과 전투가 본격적 치러진 8일의 전투를 소개하며 황박과 백마를 탄 적장을 쏘아 죽인 정담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수세에 몰려 적들에게 포위된 정담에게 부하들이 후퇴를 권유하자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 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 없다”며 동요하지 않고 맞서다 순절한 정담과 조선군의 기록이 전해진다.

그 흔적은 능선을 넘어오던 백마 탄 적장을 정담이 큰 바위에 매복하여 잡아 명칭이 유래된 ‘왜장바위’와 작은 진천골, 진천골 그리고 적들이 들어온 곳이라 불려진 적래천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유성룡은 징비록(국보)에 왜군이 힘써 싸운 조선군을 가상히 여겨 조선군의 시체를 묻고 ‘조선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弔朝鮮國 忠肝義膽)’라 쓴 말뚝을 세웠다는 일화와 함께 그들로 인해 “전라도만이 홀로 온전하였다”고 기록했는데, 그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오랫동안 성황당터로 알려진 채 남아 있다.


                                                                           돌무덤(성황당터)

이후 왜군은 7월 9일 웅치를 넘어 안덕원으로 진출했지만, 사력을 다해 싸운 조선군과의 웅치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본 왜군은 황진에게 패배하고 전주성의 방어태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퇴각한다. 웅치전투는 호남에서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며 왜장까지 전사하여 일본에서도 크게 패한 전투로 여겼다고 하며 조선군에게는 승리의 발판이 되며 전라도를 지켜내게 한 전투였다.


                                                   창렬사 앞 약무호남시무국가 비석

웅치전투 영웅들을 모신 사당 창렬사 앞에는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문구가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그동안 웅치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관과 학계·언론은 물론이고 지역민이 힘을 합치고 있다. 관군과 무명의 선조들이 남겨준 흔적을 올곧이 찾아 호남을 지켜 조선을 구한 웅치전투의 의미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행보가 바람직하다.

곰티재는 오래전부터 전주와 진안을 잇는 유일한 산길이었으며, 진안 사람들이 전주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곰티재에는 호랑이와 도적떼가 들끓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이 고개를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신작로가 개설되었지만 열악한 길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곰티재를 넘는 신작로가 개설되고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해지면서 조선 시대부터 통행하던 곰티재 옛길은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신작로 역시 길이 험하긴 마찬가지였다. 1966년에는 학생들이 탄 버스가 굴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곰티재를 대신할 모래재가 1972년 11월 개통되었다. 곰티재의 북쪽에 모래재 터널을 뚫고 새 길을 열었다. 모래재 역시 험한 길이어서 사고가 잦았다. 1989년에는 진안에서 전주로 가던 버스가 굴러 또다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96년에는 전주와 진안을 잇는 도로인 국도 제26호선이 모래재의 북쪽으로 새롭게 개설되었다. 이 길은 소태정 고개를 넘어 전주와 진안을 연결한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