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1

남원 여원재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11

남원 여원재길


여원재는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와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를 연결하는 해발 470m의 고개이다. 오래전부터 전라도 남원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였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을 연결하는 간선도로 가운데 통영로가 통과하던 구간이며, 공공업무를 수행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이용했던 역로인 오수도의 관할이었던 응령역(應嶺驛)과 인월역(引月驛) 구간이 여원재이다. 응령역은 여원재 서쪽 기슭의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에 있던 조선 시대의 역이고, 인월역은 여원재 동쪽의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 있던 역이다.

지금은 남원 시가지와 경상남도 함양군을 연결하는 국도 제24호선이 통과하고 고갯마루에는 여원재 생태이동통로가 도로 위에 조성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주요한 고갯길인 동시에 길목이었다. 교통이 편리하지 않았던 옛날에 남원에서 운봉을 지나 경상도 함양을 오가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고갯길이다.



백두대간에 자리한 여원재의 북쪽으로는 고남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갓바래봉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운봉현과 남원부의 경계를 형성했다. 본래 여원치(女院峙) 또는 여원현(女院峴)이라 불렸으며, 연재라 불리기도 한다. 이백면 양가리에서 여원재에 이르는 여원재 옛길의 거리는 약 2.5㎞이지만 제대로 복원이 되지는 못했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경상도로 진출하기 위해 여원재를 넘다가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때에 운봉현까지 왜구가 침략했다. 고갯마루의 주막을 드나들던 왜구들이 주모에게 몹쓸 짓을 했고, 이에 주모는 칼로 왜구가 건드린 자신의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했다는 고갯마루 주막 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결한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일러주었다고 전한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한다. 또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도 부른다. 고개를 통과하는 도로변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된 여원치 마애불상이 있다.


                                         여원치 마애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이순신 장군은 경상도 합천의 초계로 백의종군하기 위해 여원치를 넘어 운봉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만나기로 했던 도원수 권율이 전라남도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운봉에서 발길을 돌려 지리산 자락의 성삼재를 넘어 구례 방면으로 향했다고 전해진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경상도로 나아가기 위해 여원재를 넘고자 했으며, 이곳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고갯마루에서 운봉을 바라보면 광활한 평지가 펼쳐진다.  여원치 서쪽의 이백면과 동쪽의 운봉읍은 모두 남원시에 속하지만, 여원재는 물길이 갈라지는 분수령이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에 운봉읍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 운봉현으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여원치의 서쪽으로 흐르는 강기천은 남원시가지를 통과하는 요천에 합류해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여원치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운봉읍과 인월면을 지나 경상남도 함양군을 통과하는 임천으로 합류한다. 임천은 경상남도 진주를 통과하는 남강으로 합류하고, 남강은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즉 여원재는 섬진강 물줄기와 낙동강 물줄기의 경계이지만,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의 경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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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