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이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루었다. 혜종과 정종은 가사를 내렸고 광종은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고달사지


혜목산이 병풍처럼 포근히 감싸 안은 고달사지(사적 제382호)는 한눈에 보아도 아늑하고 편안해 보인다. 764년(경덕왕23)에 창건된 고달사는 고달원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고 뻗어나갔지만 언제 폐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달사는 道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말이다. 구산선문 중에 봉림산파의 선찰이다.
남아 있는 지금의 절터만 보더라도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 보인다. 이 절이 전성기에는 경내가 사방 30리였다고 한다.


고달사지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인 진경대사 심희가 여기에서 29년 동안 주석하고 창원의 봉림선원을 처음으로 열었다. 진경대사는 다시 원종 찬유에게 법통을 내려 원종은 고달선원의 3대가 된다. 원감 현욱은 이 산의 이름을 따라 혜목산화상이라고도 부른다. 경문왕9년(869년)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중국에서 돌아온 원종찬유는 이곳에서 크게 선법을 떨쳤으며 그의 문하에 5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고려 태조 이후 광종때까지 역대 왕실의 돈독한 지원을 받은 원종이 고달사 주지로 머물면서 전국 제일의 선찰로 면모를 갖추었다.

지금의 절터 가운데 당당하게 자리 잡은 석조대좌(보물 제8호)가 퍽 인상적이다. 고려시대 3대 석조대좌로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 김제 금산사 석조대좌, 그리고 고달사 석조대좌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정립된 팔각형 대좌는 고려때 다시 네모난 대좌로 유행하게 된다. 단순한 모습이지만 웅장하고 한편으로는 섬세한 느낌이 매우 세련되어 보인다. 지대석은 사각으로 각 면마다 네 개씩 안상을 두었다. 그 위에 팽창감 있고 율동적인 연꽃이 겹으로 이루어 복판복련화문으로 되었다. 반면에 중대석은 매우 단조롭다. 각 면에 좌우로 우주를 세우고 아래 위로 테를 두어 그 속에 큼직하게 안상을 네 면에 하나씩 새겼다. 상대는 모두 24엽의 연꽃이 복판앙련화문 형식으로 되었다.


석조대좌


석조대좌 뒤로는 높은 자리에 비가 우뚝 서있다.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인데 정식 명칭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 원종대사지비'이다. 고달사에서 제일 높은 곳이고 이 절에서 대표적인 석조 예술작품이다. 귀부의 조각이 생동감 있게 다듬었다. 머리는 마치 갈기를 날리는 숫사자처럼 포효하는 것같다. 입가에는 살아 숨쉬는듯 서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수에는 '원종대사혜진탑'이라고 제액을 쓰고 주위에는 운문 사이로 용이 꿈틀거린다.
1916년 도괴되어 파손이 된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이 자리에는 복원품으로 대신했다. 귀부와 이수는 신라말기 형식을 충실히 계승한 웅장하고도 정교한수법으로 되어 있으며 귀두는 용두화로 되고 귀갑은 깊게 조각한 육각의 귀갑문으로 했다. 등의 중앙에 장방형 비좌는 운문과 복련으로 장식했고 발은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표현하였다. 이수에는 앙련과 운문을 새겨서 용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신라의 탑비 형식과 상당한 격차를 나타내면서 고려 초기의 기풍과 발랄한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원종대사탑비


원종대사 혜진탑9보물 제7호)은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식을 따르면서 일부에는 시대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양식이 가미되었다. 방형 지대석은 연꽃으로 된 하대와 같은 돌이다. 하대의 복련은 매우 정돈되었다. 중대석은 구름 사이로 거북을 정면에 두고 돌아가면서 네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그 위에 높직한 괴임대를 두고 탑신을 놓았다. 탑신은 팔각으로 네 면에 문비형이 있고 네 면 사이마다 사천왕을 새겼다. 옥개석에는 삼산형 고사리문양으로 귀꽃이 있다. 상륜부는 팔각의 노반과 화문이 조각된 복발 위에 보개를 올리고 보륜과 보주까지 남아 있어 다른 부도에 비하면 많은 부재가 남아 있는 편이다.


원종대사탑


고달사지부도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되었다. 팔각원당형 부도 중 손꼽을 정도의 크기로 비교적 완전한 상태이다. 하대석에 안상을 새기고 안상 중앙에 화문을 넣었다. 그 위에 복련을 조각하고 1단의 괴임 위로 중대석이 있다. 중대석의 정면으로 거북을 놓고 좌우로 운문속에 네 마리의 용이 있다. 팔각의 탑신에는 문비형과 사천왕.영창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데 전각에는 높직한 귀꽃이 솟아있다. 보개석도 역시 귀꽃문이 장식되어 한층 더 꾸미려고 하였다. 전반적으로 고려초기의 우수한 작품으로 신라시대 팔각원당형 부도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고달사지승탑


원종대사는 성은 김씨이고 자는 道光으로 경남 하동에서 869년(경문왕9)에 태어났다. 13세에 상주 삼랑사의 융제를 찾아갔지만 융제는 그가 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혜목산 심희를 찾아가게 했다. 892년 23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 투자산 대동선사에게 배우고 도를 깨달았다. 29년만에 돌아와 삼창사에 머물다 경주 사천왕사에서 주석을 하였다. 다시 혜목산에 옮기고 원감국사 현욱과 진경대사 심희로 이어지는 법맥을 받았다. 이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루었다. 혜종과 정종은 가사를 내렸고 광종은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당시 전국에는 신라말기부터 개창되기 시작한 선문이 각 지방의 호족들과 어울려 역사의 재편을 이루고 새 시대를 위한 물결이 흘러가고 있었다. 고달선원은 이 무렵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전국 3대선원으로 되었다. 원종대사는 혜목산에서 90세에 입적하였고 시호는 원종대사, 탑호는 혜진으로 불렀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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