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문자로서의 ‘한글’ 그리고 한글 금속활자의 가치

2021년 5월 전후,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일원발굴조사에서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한 금속제 유물이 발견됐다.

기록 문자로서의 ‘한글’ 그리고 한글 금속활자의 가치

2021년 5월 전후,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일원발굴조사에서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한 금속제 유물이 발견됐다. 언론에 실물이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무척 높아졌다. 이 활자가 ‘훈민정음’ 반포 직후에 이루어진 한글본 인쇄술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01.공평동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의 입면 ©문화재청

02.최초의 국문 활자본, 『석보상절』 한글자 모습 ©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 기록 문자에서 일어난 세 번의 혁신

인간 문명(文明)은 문자(文字)를 통해 기록되고 전승된다. 문명과 문자에는 모두 ‘文[글]’이 들어가 있다. ‘文’은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문자를 이용한 기록의 역사에서 한민족은 세 번의 혁신을 겪었다. 기원전 3세기경에 한문자(漢文字)가 한반도에 유입된 것,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 갑오개혁(1894) 때 언문을 국문(國文)으로 법률화한 것이 우리가 겪은 세 번의 문자 혁신이었다. 이 세 번의 문자 혁신은 한국의 기록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전환기를 만들었다. 한문자의 유입은 기록을 가능하게 했고, 훈민정음의 반포는 기존의 기록 문자에 한글을 더한 것으로 하층민까지 쓸 수 있는 문자를 제공한 것이었다. ‘언문’의 국문화 법률은 공공(公共) 기록 문자를 한문자(漢文字)에서 국문으로 바꾼 문자 혁명이었다.

03 / 04.공평동에서 발굴된 금속활자의 세부 모습 ©문화재청



훈민정음을 기록 문자로 정착시키려고 한 세종의 정책

훈민정음 반포 직후 세종은 이 문자의 정착을 위해 몇 가지 일을 벌였다. 첫째, 세종은 정음 반포 이후, 당신이 직접 정음 문서를 써서 신하들에게 읽으라고 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대간(臺諫)들이 임금을 속였다 하여 세종이 그들의 죄상을 정음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냈다.

신하들이 다시 상소문을 올리자 세종은 정음으로 쓴 유시(諭示)를 내려 신하들이 읽어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8년 10월 10일 기사) 3일이 지난 10월 13일에도 세종이 정음문서 여러 장을 대신들에게 보여 주며, “경들이 내 뜻을 알지 못하고서 왔으니 이 글을 자세히 본다면 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1년 6월 20일 기사에는 세종이 신하들에게 준 정음 문서가 20장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직접 언문서를 신하들에게 준 것은 정음을 배우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세종의 뜻을 보인 것이다. 정음을 몰라서 왕이 내린 문서를 읽을 수 없는 신하의 처지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라.

둘째, 이서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 과목을 부과했다. 왕이 직접 이조에 전지(傳旨)를 내려,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시험에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뜻과 이치[義理]에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세종 28년 12월 26일 기사) 세종이 이서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을 부과한 목적은 이서들에게 정음을 가르쳐 공문서의 기록 문자로 쓰이던 이두를 정음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세종 사후에 이 정책은 정착되지 못하고, 공문서의 이두문 사용은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 양반 지배층이 세종의 뜻을 저버린 것이다.

셋째, 세종은 다섯 개의 중요 문헌(『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훈민정음’으로 간행했다. 정음을 창제한 후 이 문자를 이용하여 가장 먼저 편찬한 책은 『용비어천가』이다. 조선을 창업한 역대 조종(祖宗)을 칭송한 가사를 정음으로 편찬한 데에는 새로 창제한 문자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세종의 뜻이 담겨있다. 세종비 소헌왕후가 돌아가시자 고인의 극락왕생을 위해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석가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정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 왕실 조종의 사적편찬과 모든 조선 인민이 존숭한 석가의 생애와 가르침을 모두 정음 문자를 써서 간행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직접 지은 것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위상이 높은 인물들과 신앙적으로 존숭받던 부처의 이야기를 정음 문자로 펼쳐낸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학문적 효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유학자들이 중시한 한자음을 정음 문자로 표기했다.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을 음성 부호처럼 사용하여 조선식 교정 한자음을 표기한 책이다. 그리고 중국 한어음을 정음자로 적기 위해 『홍무정운』의 한자음 번역 사업을 시작했다. 김문과 김구에게 유교 경서의 핵심인 사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사서 번역과 중국 한자음 번역사업은 세종대에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훈민정음이 일상어를 적는 문자[諺文]일 뿐 아니라 한자음을 적어낼 수 있는 문자임을 입증하려는 시도였다.

05.『훈민정음』의 목판 판각 모습 (통문관 영인본) ©통문관

06.『동국정운』의 한글 및 한자 목활자(큰 자) ©건국대학교  /  07.연주활자 모습 ©문화재청



훈민정음 문헌 출판에 적용된 인쇄술

훈민정음 반포 직후에 간행된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는 목판본으로 간행했고,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해서 간행했으며, 『동국정운』은 목활자를 새겨 간행했다. 당시에 쓰이던 인쇄 기술 세 가지가 훈민정음 문헌에 적용된 셈이다. 이들 각 문헌의 인쇄 방식이 각각 다르게 된 것은 책의 용도와 인쇄의 편리함을 고려한 결과이다. 목판에 판각하여 인쇄한 『훈민정음』은 한문 텍스트가 기본이지만 정음 자모자와 정음으로 표기된 우리말 낱말들이 실려 있다. 정음 28자의 자형과 그 용례가 한문 속에 섞여 있다.[그림 5] 이 책을 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간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훈민정음』을 목판에 새겨두고 인출하면 많은 수의 책을 찍을 수 있다.

『훈민정음』에 쓰인 ㄱㄴㄷ 등의 초성자, •ㅡㅣ 등의 중성자, 음절자(옷, 실 등), 낱말( , 쏘다 등)은 모두 크기가 크다. 이렇게 큰 금속활자는 재료가 많이 들고, 만들어 두어도 다른 책에 쓸 일이 없어서 효용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을 고려하여 『훈민정음』이란 책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도 목판으로 간행했다. 초판본을 550부나 찍었는데 이렇게 많은 책을 인쇄하려면 금속활자 조판으로는 어렵다. 인쇄 중 조판이 흐트러지거나 무너지기 때문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금속활자 기술을 정음 문헌 출판에 적용한 것이다.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에 처음 쓰인 것이다. 두 문헌에 쓰인 한글 활자를 ‘초주 갑인자 병용한글자’ 혹은 ‘월인석보 한글자’라고 부르기도 하나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없다. 이 책들의 한글 활자는 1447년경에 주조된 것이다. 초주 갑인자는 세종 16년(1434)에 주조된 것이고. 이때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이니 정음자는 당연히 갑인자에 없다. ‘월인석보 한글자’라는 명칭은 세조 때 간행된 『월인석보』와 혼동될 염려가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두 책을 묶어서 한글 활자의 이름을 붙인다면 ‘석보월인 한글자’가 적절하다. 『동국정운』은 한자(漢字) 큰 자와 정음자는 목활자를 깎아서 만들었다. 한자 작은 자는 갑인자이다. 한자와 한자음을 표기한 정음자는 글자가 크다.[그림 6] 이렇게 큰 글자를 금속활자로 만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게다가 이런 크기의 글자는 보통 책에서 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책 조판에 써먹을 수도 없다. 그래서 큰 자 한자와 한자음 표기 정음자를 목활자로 만든 것이다. 금속활자에 비해 목활자는 제작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한글 금속활자의 역사적 의의

전근대 사회의 인쇄술에서 금속활자 주조와 조판은 가장 정점에 있는 기술이었다. 한국은 금속활자의 나라라고 할 만큼 활자 주조 시기가 앞섰고, 조선시대에서도 여러 종류의 활자가 지속적으로 주조되었다. 인사동에서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실물 활자로 증명한것이다. 그러나 갑인자와 함께 쓰인 『석보상절』 한글활자는 이번 발굴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 발굴된 활자 중에는 세조 즉위년(1455)에 주조된 을해자 등 몇 가지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활자(‘ ’, ‘ ’, ‘ ’, ‘ ’ 등)의 발견은 의미가 크다. 인쇄된 책에 찍힌 평면적 글자만 보아 오다가 실물의 입체적 활자가 나타나 그 진면모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금속활자는 인쇄의 기계화와 상업화를 이루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인쇄술이 지식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아, 사회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 활자는 기계화를 통해 대량 출판을 가능케 했고, 서양 문명의 혁신에 기여했지만 조선의 금속활자는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조선 왕조의 출판 통제, 양반층의 지식독점, 상업 활동의 제약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이러한 한계점을 이유로 한국이 성취한 금속활자 주조와 인쇄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더러 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으로 조선시대 활자 인쇄술의 역사적 의미가 약화되기는 했으나, 우리가 발명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전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기술의 발명이 갖는 의미와 그것이 빚어낸 역사적 결과는 서로 구별해서 평가함이 온당하다.  (백두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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