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생의례 관혼상제 5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인의 일생의례 관혼상제 5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장례의 절차

상장례란 주검을 처리하는 모든 장례에 관한 의례절차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죽은 후에도 영혼은 생전과 같이 살아갈 것이라는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장례에 대한 처리 절차를 마련하여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또한 사후에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후장(厚葬)이나 순장을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레 조상숭배로 이어지는 상장례 절차를 만들어내게 하였다.

- 저승사자에게 바치는 사자상(使者床)

망자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대접하기 위한 상을 사자상(使者床)이라고 한다. 저승사자는 세 명이라고 믿어 일반적으로 밥 세 그릇, 짚신 세 켤레, 동전 세 닢과 술 석 잔을 차린다. 상이 아니라 키에 차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자상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다는 이원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전통사회에서 만들어진 풍습이다.


사자상(다음에서 따옴)


전통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가 망자를 데리러 온다고 믿었다. 저승사자는 시직사자(時直使者), 일직사자(日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 3명으로, 일명 ‘삼사자(三使者)’라고도 부른다. 삼사자는 망자(亡者)를 데리고 염라대왕에게 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망자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저승자사를 대접해야 했다. 그래서 초상난 집에서는 저승사자를 위한 제물을 차린다. 그 제물 올려놓은 상을 사자상(使者床)이라 부른다.

사자상에는 일반적으로는 밥 세 그릇, 짚신 세 켤레, 동전 세 닢과 술 석 잔이 올라간다. 상은 마당이나 대문 앞 등 주변에 손이 없는 곳에 놓는다. 상이 아니라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인 키에 사자상을 차리기도 한다. 키에 차리는 경우는 지붕 위에 올려둔다. 사자상에는 초혼(招魂 임종 직후 육신을 떠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르는 의식. 고복(皐復)이라고도 하는데 망자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이름을 부른다) 때 사용한 망자의 저고리를 함께 놓는다.

부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대문을 향하는 방향으로 마당에 사자상을 차린다. 사자상은 ‘뱃머리밥’이나 ‘기머리밥’라고 부른다. 부산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해안지방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불린다. 사자상에는 일반적으로 밥, 나물, 과일, 간장, 소금, 짚신, 동전이 올라간다. 밥은 세 그릇이 올라가기도 하고 큰 그릇에 숟가락을 여러 개 꽂아두기도 한다. 지붕 위에는 죽은 이의 옷을 걸어 놓는다. 그리고 마당에서 지붕을 보고 “복, 복, 복”을 세 번 부르고,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초혼이 끝나면 이 옷은 입관할 때 지붕에서 내려 불에 태운다. 이때 사자상을 올리고 장례를 주관하는 상주가 절을 올린다. 반면에 광주에서는 사자상에 올리는 짚신의 뒤축을 잘라놓기도 했다. 이는 망자를 데리고 가는 저승사자의 발걸음을 늦추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자상을 차리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풍습이다. 현재는 임종과 장례의 절차가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사자상은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는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 상여 운구를 연습하는 빈상여놀이

빈상여놀이는 출상 전날 상여를 운구할 상여꾼들이 미리 발을 맞춰보는 놀이로 호상이면서 상가집이 부유한 경우에 행해졌다. 상여꾼들이 밤새도록 놀면서 상주와 유족을 정서적으로 위로해줬다.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며,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진도 다시래기와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호상놀이도 빈상여놀이에 속한다.

상여(다음에서 따옴)


상례는 경건하게 치러져야 하는 의례이다. 하지만 상주와 유족들을 위로하고자 놀이와 장난을 통해서 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런 놀이 중 하나가 빈상여놀이다. 빈상여놀이는 출상을 할 때 상여를 무사히 운구할 수 있도록 전날 밤에 미리 상여 앞소리꾼과 상두꾼들이 모여서 빈 상여를 메고 함께 발을 맞추어보는 놀이다. 빈상여놀이는 상가의 마당이나 골목길에서 상두꾼들이 모두 함께한다.

지역마다 빈상여놀이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강원도・경기도・충청도 지역에서는 ‘걸걸이’ 혹은 ‘손모듬’이라 하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대구리’, ‘대도움’, ‘개도둔’,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뜨리’ 혹은 ‘대어린다’, ‘상여 흐른다’라고 한다. 섬 지방에서는 ‘밤달애・대울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놀이 방법은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여 앞소리꾼은 앞소리를 부르고, 앞소리에 이어 상두꾼들은 후렴을 받으며 운구를 하는 것과 똑같이 걷는다.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가의 마당에서 상엿소리를 하면 상가에서는 상두꾼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음식은 술과 안주·꼬지떡·팥죽·닭죽 등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대접을 받으며 밤새 논다. 놀이를 하면서 사위를 상여에 태우기도 하고 어깨에 매달아 술과 음식을 얽어내기도 한다. 장난기가 많은 상주 친구가 나서서 거짓 상주 노릇을하기도 한다. 친구가 곡을 하기도 하고 가당찮은 넋두리를 하거나 여러번 문상을 거듭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런 장난은 웃기는 난장판이 아니라 정서적인 공감의 장이다. 이런 놀이를 하다보면 상주도 함께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대돋음이라 불리는 상여놀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죽은 사람의 나이가 70∼80세를 넘고 상주의 나이가 대략 50세쯤 되면서 가정이 유복한 경우에만 동네 사람들이 의례라는 틀에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상두꾼들이 출상 전날 저녁에 미리 모여서 주검을 싣지 않은 빈 상여를 메고 진짜 출상하는 것과 같이 상엿소리를 함께 부른다. 상주와 그 친척들은 대돋음을 할 때 상두꾼과 마을 어른들을 정식으로 초청한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서는 골목길에 횃불을 켜고 아들・딸・친척・친구의 집 등을 돌면서 골목길을 밟게 했다. 이 과정에서 상여가 공동우물을 지날 때는 우물을 덮어놓고 지나가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닐 때 상여 뒤를 따라가던 유족들은 본인의 집에 다가오면 먼저 가서 제물을 차려놓고 곡하며 상여를 맞이하고 상여꾼들에게 술을 대접한다.

경상북도 구미에서는 상두계원들이 출상 전날 저녁에 모여 출상을 준비한다. 상여를 받치는 원채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실제 상여는 얹지 않고, 원채만 들고서 상여가 나가는 것과 똑같이 앞소리를 메기며 상여를 메는데 이를 ‘대구리’라고 한다. ‘대구리’는 상두꾼들이 상주에게 돈을 우려내기도 하는 일종의 빈상여놀이라고 할 수 있다.

진도에서 전승되는 국가무형문화재인 ‘진도다시래기’도 일종의 빈상여놀이다.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출상 전날 밤늦도록 놀이판을 벌이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상여 어울린다’ 또는 ‘대어린다’라고 부른다. 유족들은 놀이가 끝나면 이들에게 술과 함께 팥죽이나 닭죽을 대접하면서 다음 날 상여를 잘 매달라고 부탁한다.

또 다른 무형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암사동 바위절 마을의 호상놀이가 있다. 호상놀이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0호이다. 바위절 마을에서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장수하던 사람이 사망한 경우, 출상 전날 상가에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사람들은 빈 상여를 조립하여 메고는 선소리꾼과 상여꾼이 만가(輓歌)를 주고받으며 발을 맞추어 본다. 그렇게 발을 맞추며 인근의 마을 사람들 집을 돌면서 걸립을 하는 호상놀이를 했다. 선소리꾼인 요령잽이 1명이 앞에서 상여를 끈다. 그 뒤로는 네 줄로 서서 36명의 상여꾼이 상여를 메는 형태로 마을을 돈다. 상여놀이를 할때 부르는 노래로 메기 전에 부르는 요령잡기소리와 집을 떠나면서 부르는 향도가는 이 지역 특유의 선소리로 알려져 있다.

빈상여놀이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상두꾼들이 미리 호흡을 맞추는 연습의 의미로 함께 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 이때 망인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즐겁게 놀아야만 망인이 살아있는 자손들에게 많은 복을 내려준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놀이이다.


- 부모님을 향한 효심이 담긴 삼년상

상례를 치르며 상복을 입는 기간을 삼년상이라고 부른다. 실질적인 기간은 25개월 정도이며, 이 기간에는 묘소 옆에서 여막을 짓고 부모님의 신주를 모시고 소상과 대상을 지내고 탈상을 할 때까지 생활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3년은 돌봐야 한다는 효 사상이 담겨있는 풍습이다.


삼년상(다음에서 따옴)


현대사회에서는 상례의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전통사회에서 상례는 굉장히 중요한 의례였다. 송나라의 학자 주희가 가정에서 날마다 사용하는 예절을 모아 엮은 책인 『가례』에서는 ‘관혼상제’를 소개하는데 그 중 상례(喪禮)를 가장 비중있게 다루었다. 『가례』에는 사람이 사망하면 처음 행하는 초종(初終)부터 27개월째에 행하는 담제(禫祭)까지 소개되어 있다. 유교식 상례는 27~28개월 동안 19개의 절차를 치른다. 마지막에 길제까지 지내면 상례가 마무리된다.
삼년상은 『의례儀禮』나 『가례家禮』 등에 기록되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예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으로 규정까지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4일째부터 상복을 입기 시작하는데, 아버지인 경우 참최삼년(斬衰三年), 어머니인 경우 재최삼년(齊衰三年)의 복을 입는다. 장례 이후에는 묘소 옆에 임시로 지은 여막(廬幕)에서 영좌(靈座)에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탈상 때까지 생활했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전(朔望奠)을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나가고 들어올 때는 영좌에 고하는 등 부모님이 살아계신 때처럼 섬긴다. 외출 시에는 부모를 잃은 사람은 죄인이라고 여겨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방갓(方笠)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대나무 지팡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오동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었다. 또한,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없고, 아내와 잠자리도 할 수 없었다. 상을 당하고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다. 만 1년이 되는 13개월째에 소상을, 2년이 되는 25개월째에 대상을 지내고 나서야 상복을 벗는다. 그래서 상복을 입는 기간을 통틀어 삼년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상은 1년째를 맞이하여 고인을 추모하는 제사이다. 소상을 지내고 나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신주 앞에서 울던 조석곡을 하지 않으며, 상주들은 채소와 과일을 먹기 시작하고, 남자들은 수질을 떼어내고, 여자들은 요질을 떼어낸다. 이러한 이유는 남자는 머리가 중요하고, 여자는 허리가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상은 2년 만에 지내는 제사로 이때는 옷을 소복으로 갈아입는다. 상복을 벗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옷차림은 백립, 망건, 직령대, 백화, 비녀, 신발 등 평상복에 가깝다. 대상을 지내고 나면 젓갈이나 간장, 포를 먹어도 된다. 대상을 마치면 사당에 신주를 모셔 안치한다. 영좌를 철거하고, 지팡이는 부러뜨려 버린다. 이것을 탈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삼년상은 사람이 태어나서 3년은 되어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3년이 될 때까지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듯 효도를 해야 한다는 효 사상이 반영되어있다. 삼년상 이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자식의 효는 계속 이어진다.


▶ 우리나라의 독특한 장묘 풍습

우리나라의 독특한 장묘 풍습으로 ‘초분’을 들 수 있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돌이나 통나무에 관을 얹어 놓고 탈육이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무덤이다. 초분을 만든 후에는 소나무 가지를 엮은 울타리로 주변을 둘러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해마다 이엉을 교체하는 등 보수하며 가꾼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피는 지역도 많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다니는 길에 보고 관리할 수 있도록 마을 근처의 산 중턱이나 밭 근처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초분은 본격적인 장례를 치르기 전에 시행하는 빈장의 일종이자 복장제(復葬制,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장례 방법의 하나) 라고 볼 수 있다. 풍습은 일제강점기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분이 행정적으로 금지되어, 현재는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 충청남도 보령시 녹도와 외연도의 초분상장례
충청남도 보령시의 녹도와 외연도에서는 사람을 일정기간 안치하는 초분이 행해졌음이 조사된 바 있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땅을 파면 부정탄다는 속설에 의해 초분 이후 늦은 경우엔 10년 후에 본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충남 서해 여러 섬에선 덕대초분이라는 말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데, 이는 평대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속해있는 녹도는 사슴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섬의 형태가 ' 뿔은 동쪽, 고개는 서쪽에 두고 드러누워 있는 사슴과 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녹도(鹿島)가 되었다. 녹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바로 땅속에 묻지 않고 땅 위에 일정 기간 동안 안치하는 초분(草墳)이 행해졌다.

녹도에서는 일반적으로 해안의 산비탈에 초분을 한다. 초분은 관을 짚으로 싸서 엮은 나뭇가지 위에 얹어둔 형태이다. 초분은 녹도뿐만 아니라 외연도에서도 나타났다. 외연도의 초분은 해안 가까이 밭 가에 있다. 녹도와 외연도에서 초분을 행한 이유는 주요 산업이 어업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매장을 하지만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땅을 파는 것은 부정타는 일이었다. 따라서 어업 전에 누군가 돌아가시면 부득이하게 초분을 하고 길게는 10년 후에 본장을 치르기도 하였다. 본장이라 하더라도 탈육한 뼈를 수습하는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풍장이 이어져 내려온 풍속으로 보여진다.

녹도를 비롯한 충남 서해의 여러 섬에서는 ‘덕대초분’이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덕대초분'은 평대장을 의미하는 말로 관을 놓고 그 위에 짚으로 지붕을 덮는 형식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대위를 짚으로 이엉을 이어 집과 같이 아주 크게 만들고, 한 쪽에 출입구를 만들기도 했다. 상주가 출입구를 통해 아침, 저녁으로 초분석을 드나들며 관을 살피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의 초분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에서는 초분을 초빈이라고 불렀다. 초빈이라고 부른 것은 초분을 빈소의 연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청산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작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하며, 짐승들로부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어 둔다. 보통 3년, 길게는 10년 후 수습하여 장지로 이장한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최남단의 섬이다. ‘청산도(靑山島)’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으로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려지기도 했다. 청산도에서는 초분이 1980년대까지도 섬 전체에서 시행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도락리, 도청리, 당리 등 일부 지역의 밭이나 산언덕에서 초분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조사된 바로는 청산도가 가장 많은 초분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청산도에서는 초분은 초빈이라고 한다. 초빈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분을 빈소의 연장으로 여겼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청산도에서 초분을 하는 이유는 부모님을 바로 매장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면으로는 시신의 살점은 추물로 여겼기 때문에 매장을 할 때에는 깨끗한 백골을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장지를 빨리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분을 했다. 부모님의 유언이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초분을 한 경우도 있다. 초분의 결정은 대개 집안 혹은 문중의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초분이 결정되면 초분할 장소를 정하는데 장소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경작지의 주변에 만든다. 장소를 정하면 땅을 평탄하게 만들고 굵은 돌을 관 넓이 정도 펴서 깔아놓는다. 초분을 만드는데 필요한 짚을 구해 이엉과 용마름을 만든다. 깔아놓은 돌 위에 짚을 깔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관보다 조금 넓게 펼쳐서 깔아두면 발인 후 관을 산쪽으로 머리가 향하게 안치한다. 그 위에 다시 소나무 가지와 짚으로 덮고, 이엉으로 관을 감싸올린다. 마지막으로 용마름을 올려서 초가집 지붕을 올리듯이 새끼줄을 엮어 메고 사방으로 돌을 묶는다. 돌을 묶어두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청산도에서는 초분 주위로 나무나 그물로 울타리를 만든다. 소와 같은 가축을 방목해서 키우는 경우가 많아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다.

초분을 만들고 나면 사진과 함께 혼백상자를 다시 집으로 모셔 안방 벽에 모시고 설이나 추석 등 명절마다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에 초가지붕의 이엉을 바꾸기 전에 초분의 이엉을 먼저 교체한다. 하지만 현재는 초가집이 거의 없어서 해마다 초분 이엉을 관리하는게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관리한 초분은 대략 3년 정도 지나면 날을 잡아서 이장한다. 늦은 경우에는 10년 정도 지나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3년 정도 지나면 백골만 남아 이장할 수 있다. 청산도에서는 이장을 할 때 초분을 해체하여 관을 매장지로 옮기며, 매장 전에 관을 열어 상태를 확인하거나 세골을 하지는 않는다.
- 뼈를 찌며 굿을 하는 부안군 위도의 초분관행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는 초분을 하기 전에 뼈를 추려 집으로 가지고 와서 찌면서 굿을 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렇게 깨끗이 한 뼈를 묻을 때는 석단장, 땅토롱 등을 하였다. 또한 부안읍에는 세움초분이 발견되는데, 이는 초분에서 탈육된 뒤 매장할 형편이 되지 않을 때 자른 생목 위에 뼈를 올리고 장목 3개로 괸 다음, 이엉을 두른 형태이다.

초분은 우리나라의 장례 풍속의 하나로 사람이 죽으면 주검을 바로 땅에 묻지 않으며, 입관한 뒤 돌 통나무 위나 축대에 관을 올려두고 이엉 등으로 덮어서 만든 임시 무덤을 말한다.

1968년 한국민속종합조사를 통해 부안군 위도의 초분 관행이 소개되었다.

위도에서는 뼈를 추려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시루에 넣고 찌면서 당골무가 굿을 한다. 수탉의 발목을 묶어놓고 굿을 하다가 수탉이 울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하여 굿을 중지하고 시루에서 뼈를 꺼내어 뼈 속에 든 벌레를 떨어내서 뼈를 깨끗이 한다. 그 다음, 뼈를 맞추어 백지에 싸고 상여로 옮겨 매장한다.

초분을 만들 때에는 석단을 쌓거나 납작한 돌을 지면보다 약간 높게 하고, 그 위에 대죽으로 싼 시체를 안치한다. 대죽 위에 소나무 가지를 30~40cm 높이로 쌓고 이엉을 두르고 용마루를 얹는다. 솔가지는 새끼줄이 교차하는 맨 윗줄 양쪽에 세군데씩 꽂는다. 초분 외의 가매장으로 '토롱', '땅토롱'이 있는데, 땅토롱은 외광과 내광을 파고 시체를 안치하는 내광 바닥에 넓적한 돌을 깔아 평평하게 하며, 그 위에 대발로 싼 시체를 안치하고 다시 돌로 덮은 후,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다. 토롱을 하는 이유는 초분을 하지 못할 경우에 바닥에 돌을 깔아 유골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부안군에서는 명당을 잡으려고, 육탈 후에 선사에 묻으려고, 개간사업 때문에, 가정의 우환으로 파묘를 해서, 벌레가 뼈를 갉아먹을 우려 때문에 초분을 한다고 조사되었다.

부안읍 옹정리와 줄포면 각동에는 세움초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분에서 탈육된 뒤에 특별한 사정으로 매장하지 않고 비닐부대나 라면상자에 넣어 새끼로 싸서 생나무의 밑둥을 절단하여 장목 3개를 세워 삼발이 되게 만든 후 그 위에 올려놓고 이엉을 둘러 새끼로 동여매놓은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월성리 계룡마을에서도 발견되었다. 세움초분은 개간사업으로 파묘를 했을 때도 행하게 되는 신조형의 초분이다.

- 강원도 지역의 출병

강원도에서는 ‘출병’이라는 가매장법이 있었다. 적당한 묫자리를 찾을 때까지 2,3개월부터 2,3년까지 장례를 지내지 않고 매장만 해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 부산 두구동의 채봉

부산 동래구 두구동에는 채봉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2월에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고 채봉이라는 임시 무덤에 가매장한 후 6개월에서 1년이 지난 후 이장하는 풍습이다. 채봉을 하는 이유는 영등날에 땅을 파고 묘를 쓰면 부정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등날은 날씨와 채집을 관장하는 여신인 영등할미가 내려오는 날이다.

초분은 우리나라의 장례 풍속의 하나로 사람이 죽으면 주검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입관한 뒤 통나무나 축대 위에 관을 올리고 이엉 등으로 덮어서 만든 임시 무덤을 말한다. 부산시 동래구 북면 두구동에서는 과거에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베로 싸서 삿자리로 묶고, 말뚝 2개를 교차시켜서 매듭을 지어 만든 다리 위에 올려두었다. 그 위에 지붕을 만들어 가리고 나뭇가지로 울타리도 쳤다. 이렇게 하면 비를 막으면서도 바람이 잘 통한다. 이것을 ‘채봉’ 또는 ‘구채봉’이라고 부른다.

채봉을 하는 이유는 2월에는 땅을 파고 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월에는 영등날이 있는데, 그날 영등할미가 며느리와 달과 함께 내려온다고 믿었다. 음력 2월 1일에 내려오는 영등할미는 날씨와 채집 등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누구와 내려오느냐에 따라 날씨가 다르다. 이렇게 내려온 영등신은 2월 15일 또는 20일에 다시 올라간다. 부산에서는 이 시기에 땅을 파고 장례를 치르면 부정을 탄다고 여겼다. 따라서 장례를 미루는 채봉과 같은 풍습이 이루어졌다.

채봉은 마을 가까운 곳에 세운다. 약 6개월에서 1년이 지나면 좋은 날을 받아서 채봉을 내리고 그 뼈를 다시 베에 싸서 매장한다. 정해진 장례 기간 안에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가매장을 하며 기다렸다가 장사를 지내는 이유는 반드시 영등날이 아니더라도 풍수지리와 음양설에 따라 금기일에는 장사하지 않으려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 말에 “태어난 시가 좋으면 팔자가 좋고, 장사일이 좋으면 자손들에 좋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길일에 장사를 지내고자 장례 기간을 잠시 미룬 것이다. 그러나 도시화와 산업화와 같은 변화에 따라 상례 자체가 변화하여 현재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습이 되었다.  출처/지역엔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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