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국의 명문가에게 배우다

한국은 빠르게 현대화를 추구하면서 소위 명문가라 부를 수 있는 가풍을 지닌 집안이 없어졌다. 본받고 배울 만한 집안이 없어진 것이다. 추구해야 할 정신적 가치가 실종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국의 명문가에게 배우다

한국은 빠르게 현대화를 추구하면서 소위 명문가라 부를 수 있는 가풍을 지닌 집안이 없어졌다. 본받고 배울 만한 집안이 없어진 것이다. 추구해야 할 정신적 가치가 실종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 남은 것은 돈이다. 돈에 의해서 모든 것이 지배되는 완벽한 자본주의화가 달성된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격조 있고 기품 넘쳤던 우리 조상들의 문화가 그립다.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 그리고 가르침을 지닌 집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과거에는 명문가라 지칭할 만한 집안이 있었다. 바른 삶으로 이끌고 저마다의 가풍으로 가르침을 전한 명문가의 희미한 향훈(香薰)이 그리워지는 지금, 현대인들이 가슴에 새기면 좋을 만한 명문가의 가르침을 되짚어 본다.



나라도 못 하는 빈민구제에 앞장선 명재 집안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는 명재고택으로 유명한 파평윤씨 윤증 집안이 있다. 조선시대 소론의 당수가 바로 명재 윤증이었다. 명재 선생의 가르침이 ‘뽕나무를 기르지 마라’는 것이었다. 뽕나무는 생계수단으로 누에고치는 뽕잎을 먹는다. 이걸 양반가에서 재배하면 서민들은 먹고 살 게 없다. 그래서 이를 막는 엄명을 내렸고 명재 집안은 이를 철저히 지켰다. 이처럼 서민들의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명재 집안은 가을 추수 무렵에도 그 가풍이 드러났다. 가을에 추수한 나락은 보통 5일 정도 햇볕에 말리는 게 통례인데, 명재 집안에서는 추가로 이틀 정도를 더 연장해서 말렸다.

인근에 사는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이 밤에 몰래 명재 집안 나락을 가져가더라도 눈감아주기 위해서였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도운 명재 집안만의 방법이었다. 이런 적선공덕은 6·25전쟁 때 보답으로 나타났다. 이 동네 노성면의 가난한 집안 아들이 17~18세 때 일본에 건너가 단기비행사 양성 훈련을 받았다. 자살특공대 양성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태평양 전쟁 때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의 굴뚝으로 돌격한 자살 비행기 조종사들이 이때 양성되었다. 후일 공군사관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시킨 박희동장군이 바로 이 인물이다.

박희동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 전투기를 몰고 미군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탑건이 되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고향 논산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 조종사가 없었던 상황에서 미군들과 함께 폭격에 참여하였다. 6·25전쟁 때 진해 공군기지에서 매일 미군들과 폭격지점을 논의했던 박희동은 고향 노성면의 명재고택이 폭격대상으로 정해지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당시 명재고택이 인민군 대대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던 까닭에 폭격대상이 되었지만 한국군의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 박희동의 적극적인 반대로 명재고택은 폭격을 면했다. 만약 명재 집안이 동네에서 덕을 베풀며 살지 않았더라면 이때 고택은 불타고 없어졌을 것이다. 동학이나 6·25전쟁 같은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고택이 보존될 수 있었던 집안은 대개 주변 공동체에 대한 적선과 배려가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인 덕분이었다.

01.어려운 이웃을 도운 파평윤씨 집안의 명재고택 ⓒ편집부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 안동 양반가

경북 안동은 양반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진다. 양반이라고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벼슬을 많이 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개 ‘교리댁’, ‘진사댁’ 정도이다. 높은 벼슬보다는 차관급이 대부분이었고 장관 정도의 벼슬을 지낸 집안은 손꼽을 정도이다. 그런데 왜 양반마을로 손꼽히는 것일까? 품행과 처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이 동네 양반 집안 후손들은 ‘자기 자랑을 많이 하면 양반이 아니다’라는 점을 명심하고 있다.

가문의 선조가 훌륭한 행적을 가지고 있어도 여간해서는 쉽게 자랑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다. 밥상머리에서부터 ‘자기 자랑하지 마라’는 교육을 어른들로부터 단단히 받은 탓이다. 그래서인지 안동 지방에는 각종 공덕비, 선정비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지역에는 사또, 군수들이 돌비석에 남겨 놓은 각종 공덕비가 즐비하지만 안동에는 공덕비가 없다. 이 대목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선비는 쓸데없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유풍은 퇴계 선생 가르침의 영향이 크다. 진성이씨 퇴계 선생 집안 모임의 일화이다. 집안사람 하나가 그 자리에 동석했던 타 문중 사람에게 퇴계 선생의 자랑을 하자 옆에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퇴계 종가의 종손이 손사래를 치며 이를 제지했다고 한다.

현재 퇴계 종손은 90세의 고령이다. 필자도 일 년에 몇 차례 종가에 갈 기회가 있어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대청마루에서 노령의 종손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때마다 이 어르신은 항상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하는데 담소가 길어져도 자세에 변화가 없다. 자세가 그렇게 올곧으니 자연히 입에서 나오는 말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태도가 언사(言辭)를 좌우하는 수가 많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한 장흥고씨

전남 장흥에는 명산인 억불산이 있다. 이 억불산 자락의 평화마을에는 장흥고씨들이 산다. 전라도는 동학과 6·25전쟁의 충격이 컸다. 특히 장흥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 기관총에 당한 뒤에 도주해온 마지막 동학군들이 최후로 집결했던 장소이다. 바로 석대뜰 전투이다. 석대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학군 2천 명 이상이 몰살당했다. 몰살 후 장흥에는 ‘홀기(笏記) 쓸 사람도 하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홀기는 향교의 제사에서 식순을 한문으로 적어 놓은 식순표이다. 식자층이 다 죽었다는 뜻이다. 이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대가 끊어지지 않고 마지막 호남 양반의 가풍을 유지하는 집안이 장흥고씨 집안의 무계고택(霧溪古宅)이다.

300년 된 팽나무를 비롯하여 오래된 소나무와 배롱나무 등 다양한 수목들이 3천 평의 대지에 우거져 있다. 수백 년 된 나무가 여러 그루 있으면 집안의 품격이 높아 보인다. 집 앞에는 장방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어서 호남 상류층의 정원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이 가문은 다양한 방법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다. 현재 후손 고병돈(77)의 증조부 대인 고재극이 1930년대에 땅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 집안에 속해 있던 일부 소작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증여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네 앞으로 도로가 새로 개설될 때에도 수천 평의 땅을 공동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함흥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러한 공덕으로 인심을 얻어서 동학과 6·25전쟁 때 장흥고씨 집안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다. 벼슬을 하고 재산도 있었던 부잣집임에도 불구하고 동학군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02.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에 기여한 장흥 고영완가옥 ⓒ장흥군청

03.겸손하라는 가르침을 전한 안동 퇴계종택 ⓒ문화재청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명문가가 지켜야 할 가풍을 이어오며 저마다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 수 없다. 빠른 현대화를 거치면서 성장을 거듭한 우리 한국 사회가 이제 격(格)을 높여야 할 단계로 진입하였다. 사회 내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 물질적 허세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겸손과 수신(修身),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역사의식 등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이 몸소 실천하면서 명문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널리 가르침을 전하며 존경을 받은 것처럼 각자 저마다의 가정에서 올바른 가풍을 세우며 격조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이러한 것들이 삶의 품격을 높이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선진국가로 향해 나아가는 필수 요소이다.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한 명문가들의 가르침을 아로새겨 갈등은 줄이고 화합하는 사회를 만드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출처/ 조용헌(칼럼니스트,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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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