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이야기 1

벅수와 장승長栍은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으로, 역참驛站제도와 관련이 된 장승은, 큰길(驛路)만을 안내하는 기능의 길라잡이(이정표)였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는, 미신迷信의 문화로 취급이 되어졌고, 우리 땅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장승 이야기 1


우리나라 사람들 거의 알고 있는 장승은 본래 장승이 아니라 벅수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장승長丞이라고 부르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본디, 장승이 아니라, 벅수法首다.

벅수와 장승長栍은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으로, 역참驛站제도와 관련이 된 장승은, 큰길(驛路)만을 안내하는 기능의 길라잡이(이정표)였다. 개화기때, 갑오개혁으로 역참제도는 폐지(1895)되었고, 장승도 자연 소멸하였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일제강점'때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는, 미신迷信의 문화로 취급이 되어졌고, 우리 땅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 장승을 다시 찾아내어, 벅수에 포함을 시켰으며, 1912년, 장승이 표준말이다,라고 지정을 하여, 공표를 하였다. 언문철자법통일안諺文綴字法統一案이라는 것이였다. 철저하게 따지자면, 지금의 장승이라는 말(표현)은, 일본말이나 다름이 없다.


사진; 1,

1415년(太宗,15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고방실의 장승배기 옛터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조선시대<유곡도幽谷道의 돌장승長栍>이다. 장승에서 사람의 얼굴모습(人面)이 나타나기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장승(小堠)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장승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돌장승이며, 장승의 뿌리(밑바탕)라고 할 수 있다. (2019, 황 준구, 사진).

장승의 표면에 쓰여져 있는 글(銘文)에는, 府治西十里 坊名古方松 <이곳은 고방실,마을이며, 선산도호는 서쪽으로 10리에 위치하여 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땅에 오직 하나만 남아있는, 현재의 위치가 확실하게 표현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있는 내용과, 완벽하게 서로 일치를하는, 장승이다. 크기는 121cm이고,너비는 47cm, 두께는 18cm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구미시청의 문화재 담당자들은, 그냥 흔해 빠진, 이정표석으로 표현을 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행길가의 쓰레기장에 내버려 두고(放置)있다. 배짱좋은, 우리 공무원들이 늘상 하고 있는 업무다. (NAVER; 장승의 뿌리, 고방실, 돌장승 검색, 참고).

사진; 2,

1764년 갑신년甲申年의 큰 물난리(洪水)때, 덕진면 묘동방(합천군 청덕면 모리)의 작은 장승은 일본으로 떠내려간 이후에, 시마네현의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의 옛 책, 호고일록'好古日錄(1796)에서 계패界牌로 표현된, 장승의 길이는 190cm이고 넓이는 약 19cm이며,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얼굴이 표현된 길이는 41cm이고, 일곱 글자로 된, 큰 글씨의 길이는 63cm이며, 아래의 여덟 글자 작은 글씨들의 길이는 약 63cm 정도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수십 점(基)의 우리 옛 장승을 보존하여 관리하고 있지만,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때, 우리의 벅수문화를 미신迷信의 문화로 업신여기고, 벅수를 장승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강제로 교육을 시킨 범죄자들이다.

사진; 3,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서 보존이 되고있는, 1890년, 인천에서 남몰래 훔쳐서 가져간 인천, 만수동 별리고개(星峴)의, 큰장승이다. 가슴에 쓰여있는 내용은, 自仁川官門 十里地名星峴 西距濟物浦二十里 東北距京城六十里. 이곳은 인천의 관문에서, 10리 못 미쳐에 위치한 성현마을이며, 서쪽으로 20리에는 제물포가 있고, 동북쪽으로 60리는 서울이다라는 내용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크기는 229cm다. 이 세상에, 오직 1개(基) 만 남아있어, 공개되고 있는, 완벽한 나무장승이며, 보물급의 큰장승(大堠)이다.



장승長栍이라는 것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이 도입(487)한, 역참驛站제도의 한 부문으로, 나라의 큰길(驛路)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관로나 국도만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기능의 돈대墩臺(흙과 돌로 쌓은 팻말)를 만들어 세웠었고, 조선시대에는 좀 더 발전을 하여, 돈을 댱승 또는 후(堠; 댱승,후/ 돈대,후)라고 표현을 하였다. 장승은 큰길의 5리里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乘輿司)에서 세우고, 나라(察訪)에서 관리를 하였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法首(天下大將軍 地下大(女)將軍와는,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 이였다. (NAVER; 장승과 벅수가 서로 다른 이유. 검색 참조).

장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와, 이웃 마을의 이름과 거리距離, 그리고 방향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세웠고, 중국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유행병과 잡스러운 귀신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미르(龍) 혹은 치우蚩尤 또는, 중국의 전설속에 나타나 있는, 황제(王)나 장수將帥들의 무서운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여, 큰길의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후堠 또는 장승長栍이라고 하였다. 주로, 후堠라 쓰고, 댱승(쟝승)으로 읽었다. 장승이 세워 진 곳을, <장승이 밖혀있다,>라고 하여, 장승배기(장승백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법전法典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보물, 제1521호)에는, 넓은길(驛路)의 10리에는 소후小堠(작은장승)를 세우고, 30리에는 대후大堠(큰장승)를 세워서, 역참驛站(말馬)을 바꾸어 탈수있는 역驛과 숙박시설酒幕)이 있는 곳임을 알린다.라고 기록 하였다.

1670년(현종,11년),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도, 후堠(장승)에는 이수里數와 지명地名을 확실하게 새기며, 이정을 표시하는 원칙은 凡官路 每十里 立小堠 三十里 立大堠堠 刻某府 東距幾里 地名某 南西北同으로, 큰길의 10리에는 작은장승을 세우고, 30리에는 큰장승을 세우며, 어느 부,목,군,현,으로 부터, 동,서,남,북의 어떤 방향으로, 몇리에 위치 하고 있는 곳이며, 현재의 장소를 정확하게 새긴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정조대왕 13년(1789), 이의봉李義鳳에 의하여 만들어진 책, 고금석림古今釋林(辭書의 내용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며, 국도(驛路)의 10리里나 5리에, 나무로 만든 사람의 모습을 세우고, 몸의 가운데에는 지명地名과 리수里數를 썼다. 이것을 댱승이라 한다. 한어漢語(中國語)로는 "토지노아"土地老兒라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土地老兒를 쟝승이라고 표현을 한. 우리의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몽어유해蒙語類解(1768)와 역어유해譯語類解(1775)에는, 댱승과 쟝승이 함께 쓰여져 있어, 장승이 순수한 우리말(韓語)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프랑스의 동양어학교 도서관에는, 우리나라에서 훔쳐간,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뎡니의궤整理儀軌가있다. 정조대왕이 1797년 정사년 원행길에, 우승지右承旨 이익운李益運에게 안녕리安寧里에, 현륭원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장승長栍을 세우라,라는 어명御命을 내린, 전교傳敎의 기록이 담겨져 있다. 임금의 명령(御命)에 의하여 세워진, 장승이다. 조선시대의 수원땅은 온통, 장승배기였다.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라는 백과사전에는, 長栍의 栍字는, 音(소리)은 生이고, 잘못된 음이 承이다. 길라잡이인 木人은 長栍이고, 사실과 다르게 표현된, 사투리는, 長承(丞)이다.라고 기록하였다. 栍字는 중국이 만든 글자(漢文)가 아니고, 조선이 만든 韓字로, 쟝승·생자로 읽는다.

일제강점'때의 조선총독부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이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法首를 망령된 신앙(迷信)으로 취급을 하여, 쓸모(가치)를 깎아내렸고, 갑오개혁때 역참제도가 폐지(1895)되어, 우리 땅에서 이미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는, 길라잡이 기능의 장승을 다시 찾아내어, 벅수에 강제로 포함을 시켰다. 그리고, 장승으로 쓰고 부르도록 표준말로 지정을 하여,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벅수를 장승이라 부른다. 장승이란 표현은 쪽발이들이, 재창조하여 만든, 일본말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의 諺文綴字法통일안 확정, 공표 참고).

지금, 장승과 관련이되어, 널리 알려진 뜬소문들은, 일제강점기때,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변질이 된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장승의 실제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져 보지도 못한, 장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장승전문가들 끼리 모여, 장승제, 장승축제, 장승문화, 장승명인, 장승예술, 장승쟁이, 불교장승보존회, 한국장승진흥회, 장승학교 등으로 이름을 짓고, 모두들 장승의 명인(大家), 혹은 장승의 전문가라고 일컫는, 장승명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 누가 보아도 웃기는 옹졸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승이란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개화기때 우리 땅에서 임무를 모두 끝마치고 사라진, 길라잡이(이정표)이였을 뿐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고려시대때, 절집(寺剎)에서 서민(백성)들을 상대로하여, 운영을 하였던 이자利子놀이이며, 사채업(高利貸金)의 한 종류로,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였던 말뚝(푯말) 역할의, 장생표주長生標柱(國長生,皇長生)가, 승의 뿌리(由來)다,라는 뚱딴지같은 억지를 부렸다.

우리 민속학자 1세대들은, 이에, 한마디 반론(변명)도 하지 못하였고, 그들의 생떼(억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도 그들이 쓴 책과 논문 그리고 모든 백과사전에는 장생고(私債業)와 장생표주(말뚝)를 장승의 유래(根本)라고 기록하고, 보물寶物로 지정을 하였다. 참으로 한심하고, 기절할 노릇이다. 근본 원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한, 우리 민속학자, 1세대들이 소갈머리 없이, 일본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반박하거나, 논설 없이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그 누구도 조선시대때 만들어 진, 장승이라는 실제의 모습(實體)을 본 사람이 없다. 현재, 우리 땅에는 장승의 실제모습(實物)은 물론, 장승에 관한 옛 그림(기록)이, 한점도 남겨진 것이 없고, 오직 한시漢詩 몇 구절과 고전, 판소리 타령속의 노랫말 몇 가락만이 남아있어, 전傅하여 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승이나 벅수를 새로 만들어 세운 이후에는,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썩고, 넘어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 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뿌리깊은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겨진, 장승이라는 실제의 모습을 우리 땅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산의 고방실 장승배기의 돌장승을, 문화재청에서는 장승이 아닌, 이정표석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너무나 한심寒心하여 기氣가 막힌다.

옛 장승들의 사진자료는, 벅수와 장승을 공부하고 있는, 황준구(76,그래픽 디자이너)가 2015년, 외국 대사관과 문화원의 유물자료들을 뒤져, 그들의 박물관,도록에 기록되어 있는, 개화기때, 우리나라에서 도둑질하여 남몰래 훔쳐서 가져간, 장승의 실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을 찾아내어, 옮겨 온 것 이외에는 별다른 자료가 없다. 그리고, 선산읍 고방실의 돌장승도, 우리의 문화재청과 민속학자 그리고 모든, 백과사전에는 이정표석里程標石이라고, 일제강점기때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옛, 돌장승의 실제 모습(實體) 사람의 얼굴모습(人面)이 나타나기 이전以前이라는 것을,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교를 하여, 장승으로 기록(認定)을 하여 알렸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재청과 민속학자들은 입을 욱다물고 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옛 조선총독부를 연상시킨다. (NAVER; '장승'의 뿌리, 고방실 '장승배기' 돌장승. 검색 참고).

지금, 일본을 제외한, 외국의 박물관들이 가지고 있는 장승은, 모두 4개(基)로,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서 만, 전시되고있는, 큰’장승 1개와 작은’장승 3개 만이 남아 있어, 보존保存이 되고 있다. 큰장승1개는,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 있고, 작은장승들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민속 박물관과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 민속박물관, 그리고, 독일의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 각각 1개씩, 총 4개(基)의 장승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도둑질의 천재로 알려진, 이웃나라 일본의 박물관들은 침묵만 하고있다. (NAVER; 유럽 박물관소유의, 조선 장승, 검색 참고).

개화기(1876)때 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女)將軍이라는 명문(이름)을 가진, 수호신 역할의 벅수法首들은, 세계 여러나라의 박물관에 두루두루 분포되어,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벅수를 장승으로 표현 하고있는, 실제의 전시품(法首)들은, 모두가 볼썽 사나운 품바의 모습을 하고있는, 입 찢어지게 하품을 하는, 이빨 빠진 흉물들 뿐이다. 그들은, 우리 조상의 모습이다,라고 우긴다. 창피하다.

지금, 장승전문가로 행세行世하고 있는 대부분의 공예가들과, 우리의 행정부와 국립민속박물관 심지어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모든 백과사전 그리고 언론에서 마저도,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이라는 벅수를, 장승으로만 표현을 하고, 장승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각 대학의 민속학자와 미술평론가들은, 벅수를 장승으로 알고 있는, 지극히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쓴 책과 논문에는, 벅수가 몽땅 장승으로만, 표현이 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찌꺼기를 부끄러움 없이,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친일파들이며, 소갈머리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에서 공부를 한, 이른바 1세대 민속학자들의 제자들 이며, 계보가 또렷하다. 그들이 주로 쓰는 말과 글들이, 그들이 쓴 책과 논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민속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의 석사학위 논문들을 살펴보면, 제목은 장승에 관한 연구논문이지만, 실재의 내용에는 장승에 관한 글은 한 줄도 없다. 오직, 벅수를 장승으로만 표현하고, 죽 벌여놓아(列擧),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논문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쓰레기 냄새를 풍긴다.

장승에 관한 고찰, 장승의 미학, 또는 장승의 양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에 관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은,-- 이러한 논문을 통과시켜 준, 논문 심사위원들은 과연, 교수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근본적인 지식을 의심하여 본다.

우리가, 우리 민속문화의 뿌리라고 하는 수호신'기능의 벅수法首와, 큰길만을 전문으로 안내하던, 길라잡이 기능의 옛 장승長栍을, 서로 나눔하지를 못하고, 이대로 계속하여 살아간다, 라고 한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장승과 벅수는 확실하게 서로, 나눔이 되어져야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988년부터 1997년까지 10년 동안, 전국의 전통 마을당산을 조사하여 발행한, 이라는 여덟 권의 책에는, 우리 땅의 모든 벅수는, 장승으로만, 엄격하게 표현이 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때의 표현을, 아직도 사용하고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벅수를 왜곡하고 변질을 시켜서, 강제로 장승이 되었다.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기관을, 우리는 國立이라고 한다. 어느 나라의 국립인지, 정말로 한심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승연구가로 널리 알려져있는, 김두하金斗河(1911-1996)는, 그의 책 벅수와 장승(集文堂,1990)에서, 벅수와 장승을 명쾌하게, 서로 나눔 하지를 못하였고, 장승이표준말이다,라고 아리송하게 얼버무리며, 조선총독부의 편便을 들었다. 그리고, 큰길만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가진, 본래의 장승을 노표장승路標長栍이다.라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표현하였다.

장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민속학자가 또 한 명 있었다. 한국민속’의 개척로 평가를 받고있는,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1926-2012)박사는, 대장군 신앙의 연구(1999, 민속원)라는 그의 책 서문序文(6page)에, <정월 대보름날, 장승배기의 대장군大將軍 주변에, 금줄을 치거나 황토를 뿌리고, 마을 공동의 洞祭(마을제사)로 엄숙하게 장승제를 지낸다.>라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하였다. 장승배기에 장승이 아닌, 대장군을 세웠다, 라는 표현은, 서낭당(堂山)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울었다.

장승이란 것은, 큰길(驛路)만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단순 기능의 길라잡이였다. 조선시대의 법전法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이 되어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을과 성문 절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女)將軍은 장승이 아니고, 벅수法首라고 부르고, 쓰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불교의 근본이 되는 화엄경華嚴經에는, 벅수가 <벅수보살法首菩薩>로 그려져 있다. 1520년에 쓰여진,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상고시대의 역사책에는 단군 할아버지를 선인법수仙人法首로 표현하였고 전라도 부안땅, 내소사의 역사책 來蘇寺誌에는, 1770년, 내소사 어귀의 서낭당에 法守(法首)를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의 석가모니 후불탱화.(1780)의 그림설명(畵記)에도, 法首萻薩과 西方法首萻薩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벅수는 결코, 장승이아니다.

그리고, 장승은, 우리백성들 모두에게는 도움이 되지를 못한, 벼슬아치와 양반네들 만의 전용물이었을 뿐이다. 벅수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우리 백성들은, 99%가 까막눈이(文盲者)들 이었기 때문이다. (NAVER; 까막눈이들의 땅에, 장승과 벅수를 세운 뜻은, 검색 참고).  출처 : 장승 전문가 황준구 선생


이번호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장승, 벅수, 솟대.. 등 이땅을 지켜주던 수호신에 관하여  수십년간 우리나라 전국 곳곳을 누비며  연구 해 온 황준구 선생의 글을 연재하고져 한다.



* 황준구 선생 프로필


1946년에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선경그룹(SK)'과 '현대중공

업'에서 '근무'하였으며, 2000년에 정년 퇴직을 하여,- 20여 년 동안 '장승'과 '벅수'가 '왜곡'이되고 '변질'된, 까닭(來歷)을 '추적'하여 밝혀내는 '공부'를 하고있다.


자라나고 있는,- 우리 '후손'後孫들에게, 올바른 <'벅수문화'>를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민속문화'의 뿌리>라고 하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는,- 심각하게 '오염'되고 '변질'이 되어 있으며,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 '마을'의 들머리와 날목의 '당산'(서낭당)에서,-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 꼴로 세워 져, <'이집터'의 '미이라'>를 '연상'시키고 있다. '꼴불견'이다.


<'장승'에 대하여 아는것이 하나도 없는 '장승전문가'들은,- '벅수'를 '장승'이라고 부른다.> '정부'政府에서도, '민속학박사'들도, '국립민속박물관'에서도, '교과서'와 모든 '백과사전'에도 '벅수'는, 모두 '장승'으로 만 '표현'이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찌꺼기'다.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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