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족 당나라 환관이 되다.

고구려 왕세자의 증손자는 668년 나라가 망하자 8살 나이에 당나라에 끌려갔다. 한 권력가 집안의 노비로 전락해 종살이를 했다. 그 뒤 거세를 당하고 당 황궁에 들어가 내시(환관)로 일해야 했다.

고구려왕족 환관이 되다.

고구려 왕세자의 증손자는 668년 나라가 망하자 8살 나이에 당나라에 끌려갔다. 한 권력가 집안의 노비로 전락해 종살이를 했다. 그 뒤 거세를 당하고 당 황궁에 들어가 내시(환관)로 일해야 했다. 황궁에서 처신을 잘한 덕분에 말년엔 환관 최고 직위에 올랐다. 유년 시절 이산과 노비의 삶을 겪다 내시의 우두머리가 되어 눈을 감은 옛 고구려 왕족. 그의 이름은 고연복(高延福, 661~723)이다.

고연복이 끌려간 뒤 환관이 되기까지의 행적은 당나라 사서인 <구당서>의 ‘고력사’ 전에 나온다. 양부인 고연복이 입궁 전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 집안에서 노비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에 끌려간 고구려 주민들이 노비가 된 사례는 기록상 적지 않았다.

왕족 고연복이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무삼사는 고연복을 부리다가 황궁에 바쳐 거세시키고 환관으로 만들었다.

고연복은 고종부터 현종 대까지 여러 황제를 받들었다. 하지만, 무삼사가 그를 입궁시켜 환관으로 만든 사실은 후대의 묘지명에 기록되지 않았다.

무삼사는 측천무후가 물러난 뒤 황제 후계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이다 살해됐다. 동조 세력이던 위황후, 안락공주 일파도 훗날 현종이 된 이융기의 정변 때 처형됐다.

이런 변고들로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뒤 묘지석이 새겨졌으므로 무삼사의 행적은 당연히 넣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은 추정했다.

당의 환관 고연복이 7세기초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 27대 임금 영류왕(재위 618~642년)의 왕세자 고환권(高桓權)의 증손자였음을 일러주는 옛 기록이 국내 학계에 나왔다.

안정준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1일 한국고대사학회 누리집 자료실에 ‘새로 발견된 고구려 유민 고연복 묘지명(墓志銘: 망자의 행적을 비석이나 돌판에 적은 글)’이란 글을 올렸다.

고연복의 파란만장한 삶의 일단을 담은 무덤 기록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지난해 중국 학자 왕롄룽(王連龍)과 충쑤페이(叢思飛)가 현지 학술지 <중국서법·서>(2019년 10월호)에 기고한 관련 논문을 입수해 요약, 해설한 것이다.

고연복은 고종, 무측천, 중종, 현종 황제를 받들었던 당나라의 최고위급 환관이었다. 왕족 이융기가 정변을 일으켜 당 현종으로 즉위할 때 거사를 도왔고 애첩 양귀비를 소개한 총신으로 유명해진 환관 고력사가 그의 양아들이었다. 아들 고력사의 도움으로 고연복은 현종 즉위 뒤 환관 중 가장 높은 직위인 내시성 장관 자리에 올랐다.

최근 중국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국내 학계에 처음 존재가 알려진 고구려 왕족 출신 고연복의 묘지명. 그의 증조부가 고구려 영류왕의 왕세자인 고환권임을 일러주는 내용이 드러나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안정준 교수 제공



묘지명에서 우선 주목되는 대목은 고연복의 집안 내력이다. 지문을 보면, 무덤주인의 이름은 복(福)이고, 자(字)는 연복(延福), 출신은 발해인(渤海人)으로 표기되었다. 발해는 발해군(勃海郡)의 다른 이름으로,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滄州)시 남동쪽에 있던 한나라 이래의 군 이름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멸망 뒤 끌려온 보장왕의 손자 고진(高震)과 증손인 고씨부인(高氏夫人)의 묘지명에도 각각 ‘발해인’으로 출신지를 표기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같은 왕족의 후손을 표방한 고연복이 자기 가문을 발해군에서 기원한 것으로 적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게 안 교수의 해석이다.

오래전 발견돼 국내 학계에도 알려진 고연복의 비석문 ‘당고고내시비(唐故高內侍碑)’ 기록에도 고구려 정벌 뒤 나라 잃은 왕의 족속으로서 환관 직을 맡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묘지명과 비문 내용을 종합하면 고연복은 본래 고구려 왕실 출신으로서, 멸망 뒤 당에 들어와 환관이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쓴 두 중국학자인 왕롄룽과 충쑤페이는 고연복 묘지명에 증조부로 기록된, ‘권(權)’이란 이름을 지닌 인물을 주목했다. 고씨 성을 붙여 고권(高權)이란 선조는 바로 영류왕의 세자인 고환권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고환권은 640년 2월 당에 사신으로 가서 태종을 접견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전한다.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100여 명을 몰살시키며 정권을 빼앗은 뒤 고환권의 행적은 일체 알려진 것이 없다. 왕과 함께 제거됐다는 설들이 나오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을 즉위시키면서 영류왕 일가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이와 달리 고연복 묘지명은 영류왕 후손 일족이 당에서 명맥을 이어나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역사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영류왕 23년(640) 봄 2월초에는 “세자인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환권은 사신의 임무를 띠고 갔기에 성년 나이였을 것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고연복은 개원(開元) 11년인 723년 63살로 숨졌다고 나온다. 거슬러 계산해보면, 당 고종 때인 현경(顯慶) 6년(661)에 그가 태어난 것이 된다. 나이를 고려할 때, 고환권이 대략 고연복의 증조부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게 논문에 나온 중국 학자들 견해다.

당시 당으로 넘어간 백제·고구려계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당나라 습속에 맞게 두 글자에서 한 글자(單字)로 바꾼 경우들이 묘지명 등에 흔하게 보인다는 점도 선조인 고환권의 이름을 ‘권’으로 줄여 표현했을 것이란 추론의 근거가 된다.

안 교수는 “사서에 나오는 ‘환권(桓權)’과 묘지명에 나오는 ‘권(權)’ 을 동일 인물로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더 필요하지만, 영류왕 조카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 연개소문이 영류왕 일족들을 모두 제거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왕세자 고환권의 후손일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고연복이 당에 끌려간 시점에 대해서도 논문을 쓴 중국 학자들은 668년 9월 21일 당의 동도행군총관이던 장군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 보장왕과 그의 아들 복남(福男), 덕남(德男)과 대신 등 20만여 명을 당에 끌고 간 기록을 일종의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8살 왕족 고연복 또한 다수의 고구려 지배층이 끌려간 행렬에 포함되었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출처 / 안정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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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