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첫 불교신자의 집에 있는 우물, 전모례가정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마지막에 스스로를 ‘불국토(佛國土)’로 칭하며 받아들였다.

신라 첫 불교신자의 집에 있는 우물, 전모례가정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마지막에 스스로를 ‘불국토(佛國土)’로 칭하며 받아들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에 머물고 있던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一善郡, 현재 경상북도 선산읍)에 살고 있던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다고 한다. 또는 승려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불교를 전해주었다고도 한다.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에는 우물이 하나 남아있는데 이 우물은 모례가정(毛禮家井) 즉 모례의 집에 있었던 우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흔히 이차돈의 순교로 대표되는 사건은 신라 불교의 극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차돈의 순교가 그려진 이차돈 순교비는 ‘백률사비’로도 불렸는데, 진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서 볼 수 있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당연하게 인식이 되지만, 최초 신라에 불교가 전래 되었을 당시 상황과 그 과정을 살펴보면 불교에 대해 반발했던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불교’가 성립하기까지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은 불교가 신라의 국교이자, 강력한 통치로 활용이 되면서 수많은 불교유적을 남겼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라불교초전지는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러한 신라불교의 초전지가 바로 기자의 고향 인근인 구미의 신라불교 초전지인 전모례가정을 중심으로 소개해 본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불교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측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달했다고 한다. 이후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의 수도에 방문하여 불교를 처음 소개하였다. 한편 신라는 법흥왕 12년인 627년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었으며, 불교가 전해진 것은 법흥왕 이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국가는 신라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과 인도의 승려가 직접 불교를 전하였지만, 신라에는 고구려에 머물고 있었던 승려 묵호자(墨胡子)를 통해 불교가 전해졌다. 묵호자는 흑호자(黑胡子)라고도 부른다. 이 명칭은 승려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한자 뜻을 그대로 풀이한 “얼굴이 검은 외국인”이라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도화상



신라에 불교를 전한 묵호자, 아도화상, 그리고 모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신라 19대 눌지왕 대에 고구려에 머물고 있었던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묵호자는 신라 일선군(一善郡, 현재 경상북도 선산읍)에 살고 있던 모례(毛禮)의 집에 방문했다.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첫 번째 불교 신도가 되었으며, 묵호자를 본인의 집 토굴에 숨겨주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온 사신이 향과 옷을 신라에 전했는데, 왕과 신하는 향의 쓰임새를 알지 못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향의 용도를 아는 이를 수소문했다. 모례의 집에 머물고 있던 묵호자가 향의 이름과 쓰임을 알려주었으며, 향을 태워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 신라의 공주가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왕이 묵호자를 불러다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게 하여 병이 곧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후하게 사례했으나 묵호자가 곧 사라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삼국유사>에 “아도가 신라에 불교의 터전을 마련하다”를 보면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으로 와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 대에 승려 아도(阿道, 또는 我道) 화상(和尙)이 시중을 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아도화상은 모례의 집에서 몇 년을 살다가 죽었으며 아도의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경(經, 부처의 가르침이 쓰여진 경전)과 율(律, 전통음악에 사용되는 음율)을 강독했다. 종종 이를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었다. 아도의 생김새는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묵호자를 비롯해 집에 모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가 창건되었다고 하니, 신라불교 초전지와 도리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 : 모례의 집 우물

앞선 이야기를 통해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된 곳은 모례의 집이었으며 첫 번째 불교 신자는 모례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에는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 있다.


    



전모례가정은 깊이가 3m정도이며 면적은 246㎡이다. 직사각형 돌을 이용해 우물 정(井) 모양으로 짰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았을 때에는 井 형태이지만 우물의 안쪽은 원통형이다. 우물의 밑바닥은 가운데 배가 부르고 두꺼운 나무 판자를 깔아 만든 것이 특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우물이 대부분 원형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井 형태로 남아있는 전모례가정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우물로 추정된다.

용어가 낯설고, 어렵지만, 한자를 풀이해보자면 “전한다는 의미의 전(傳) + 사람 이름인 모례(毛禮) + 집에 있는 우물이라는 (家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우물에 지나지 않지만, 이 우물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일부사진 / 네이버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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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