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조각을 찾아서

‘만 가지 복을 기원한다’는 뜻을 지닌 만복사(萬福寺)는 다양한 문화재와 이야기가 엉켜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조각이다.

역사의 조각을 찾아서


남원은 광한루, 실상사, 만복사지, 황산대첩비지 등 쉽게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만 가지 복을 기원한다’는 뜻을 지닌 만복사(萬福寺)는 다양한 문화재와 이야기가 엉켜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조각이다.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南原 萬福寺址)


역사의 장면마다 등장한 만복사

만복사는 전북 남원시와 순창을 잇는 도로에 따라 사역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고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불, 석탑, 석대좌 그리고 당간지주 등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창건 시기를 알 수 없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문종 때, 『용성지』에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숙종 때 편찬된 『용성지』에는 “정유재란의 병화에 불타 잿더미가 된 뒤 사찰을 갖추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정유재란 때 전각들이 소진되고 35척의 동불도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남원부사 정동설이 1679년 방 2개를 중창하고 승려를 살도록 하여 법맥을 이었으나 사세가 쇠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1733년 영조와 사도세자를 비난하는 벽보를 불상의 귀에 걸어놓은 남원 괘서 사건에 만복사가 연루된 것을 계기로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만복사의 위용

1979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는 1985년까지 사역 중심곽을 조사하였으며 발굴조사가 끝난 다음에는 사역을 정비하였다. 사역을 정비하면서 석불 보호각과 석인상을 발굴조사하고 석불 보호각을 중건했으며 석인상을 인근지역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또 2014~2015년에는 경남발전연구원에서 사역의 남쪽, 남원~순창을 잇는 도로의 남쪽 지역을 발굴조사하여 고려시대 중기를 전후한 시기의 건물지와 조선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수전(논)이 조사되었다.

중심곽을 조사한 결과 목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쪽에 금당이 있는 1탑 3금당식 가람인 것이 밝혀졌다. 이는 신라의 1탑 3금당식과는 다른 고구려식 1탑 3금당식 배치다. 즉, 남쪽에 있는 중문지를 통하여 중심곽으로 진입하면 남북중심축선에 목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북금당지, 강당지가 자리하는 것이다. 또 목탑지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금당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동쪽과 서쪽으로 남회랑지가 위치한다. 동회랑지나 서회랑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강당지의 동쪽과 서쪽에는 회랑이 아닌 건물지들이 조사되었다. 특히 동쪽 지역에서는 생활유구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어 승방지 영역으로 추정했다.

목탑지와 북금당지의 남쪽에는 석등 하대석이 남아 있으며 서금당지 남쪽에는 석등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방형 석재가 자리하고 있다. 또 목탑지와 서금당지의 남변 기단 남쪽으로는 넓적한 돌을 깐 시설이 이어지며, 부석 시설은 북금당지 남변 기단 외부에도 있다. 천석과 할석을 이용한 부석시설은 개개 건물지의 남변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지로 한단 높게 참도를 구성하고 있다.

중심곽을 구성하는 목탑지, 북금당지, 서금당지, 동금당지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갑석은 확인되지 않으며 서금당지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우주도 남아 있다. 서금당지 내부에는 불대좌, 북금당지 중앙 칸은 통칸으로 반원형 연화문 대석 2매석으로 구성된 좌대가 있으며, 동금당지 중앙 칸 바닥에는 40cm 내외의 천석이 깔려 있어 좌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굴조사 중 제토 과정에서 석불입상의 광배 윗부분이 출토되었고 4층까지 남아 있던 석탑의 5층 옥개석이 출토되어 복원되었다. 또 5층으로 복원된 석탑의 남쪽지점에서 신라계 양식의 석탑 옥개석 3매와 기단석재가 출토되었으며 인접 지역에서 천석으로 만든 방형 석탑지가 확인되었다. 석탑지는 외곽에 비교적 큰 천석을 놓고 그 내부를 천석으로 채웠는데 내부 중앙 부분에서 ‘萬曆三十六年’(선조 41년, 1608년)이라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되었고 근처에서 보개로 추정되는 상륜부재가 수습되었다. 7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각종 막새류와 자기 등 유물 1,3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 이전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특히 4엽 연화문 수막새와 6엽 연화문 수막새 그리고 쌍조문 암막새는 당시로서는 호남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막새들이었다.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 가람배치가 고구려식의 1탑 3금당식으로 확인되었으나 고구려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시간적으로 간극이 컸다. 그리고 고구려 가람의 경우 북금당이 다른 금당들에 비해 규모가 커서 중심법당이었고 동·서 금당은 가람의 남북 중심축과 직교하는 방향, 즉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어 만복사의 가람과는 차이가 있다. 목탑지와 서금당지를 비롯해 동금당지, 북금당지 등의 기단 내외부를 탐색 조사한 결과 목탑지를 제외하고 금당지들은 조선 전기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북금당지에서는 면석의 뒤쪽에 와적열이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천순’(1457~1464년)이라 새겨진 명문와가 섞여 있어 조선 세조 연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3곳의 금당이 15세기를 전후해 조성되었으며 1탑 3금당 가람의 형성도 건물 중심축선이 목탑지와 같지 않아서 본디의 구도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01.만복사지 위성사진 02.만복사지 목탑지 03.보물 제43호 남원 만복사지석조여래입상


기록과 조사의 차이에 대해서 계속 연구

『동국여지승람』에는 만복사가 “기린산 아래에 있는데, 동쪽에 오층전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이 있다. 전 내에는 동불이 있는데, 길이가 35척(약 10.6m)이다. 고려 문종 때에 창건 되었다”라고 하여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목탑지와 서금당지 조사에서는 두 건물지가 공유하고 있는 부석의 하부에 시기가 앞서는 유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 기단 내외부 조사를 통하여 선행하는 유구의 구지표면이 현재의 지표면보다 50여 cm 하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금당지의 선행 유구가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탑과 금당이 남북 방향이 아니라 동서 방향으로 배치된 가람은 일본 법륭사 서원과 법기사 등에서 볼 수 있으며 5층 목탑이라는 것도 같은 양상이다. 또 문헌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개경에 창건한 사찰 중 대선원보제사(연복사)도 같은 양상이며 시간적인 차이도 크지 않아서 같은 맥락의 가람배치로 파악된다. 다만 이들 가람이 만복사와 달리 서쪽에 목탑이 있고 동쪽에 금당이 있는 것은 창건 가람의 확인과 함께 연구 과제이다.

만복사는 문헌기록처럼 동쪽에 탑이 있고 서쪽에 금당이 있는 가람으로 고려 문종대에 창건되었고 조선 세조대를 전후해 목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쪽에 불상을 모신 전각이 중창된 1탑 3금당 형태의 가람으로 운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만복사 경역이었던 지역이 수전으로 경작되고 장대석들이 정연하게 놓여 있는 유구 등은 만복사가 고려말에 사세가 위축되었고 중창을 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04.만복사지 석인상 05.보물 제31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 06.보물 제32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수록 된 「만복사 저포기」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만복사가 쇠락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또 최척전은 정유재란 전후 만복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판소리 <춘향가>에도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만복사가 등장한다. 문학작품의 배경으로서 만복사는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것보다 더 많은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조사와 연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출처/윤덕향(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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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