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太白 鐵岩驛頭 選炭施設) 등록문화재 제21호

한국의 산업화시기에 에너지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설로서, 선탄 설비와 저탄장, 폐석장 일대가 근대산업유산으로 인정해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太白 鐵岩驛頭 選炭施設) 등록문화재 제21호
강원 태백시 철암동 365-1번지

화전민의 땅이었던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은 1930년대 철암역 뒤 우금산 일대에 조선총독부의 탄광 개발에 따라 탄광도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1935년 선탄시설이 들어섰고, 1940년에는 철암역이 완공되었다. 선탄시설은 지하 갱도에서 끌어올린 석탄을 선별하고 가공 처리하여 화차에 그대로 싣도록 설계되어있다. 현재는 증기 기관차가 아닌 디젤기관차로 석탄을 운반하고 있다. 선탄시설은 한국전쟁 직후와 1970년대에 일부 수선과 증설이 이뤄졌으나 구조는 예전 그대로다. 해방 후 태백을 비롯한 강원도 남부 지역의 탄전은 산업 발전과 가정용 연료로 절대 비중을 차지했던 석탄 공급기지의 역할을 감당했다. 석탄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든 1990년대 이후 태백 일대는 폐광이 잇따르면서, 새로운 살 길을 찾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현재도 일부 가동 중이며, 일반인도 일부 시설을 둘러볼 수 있다. 한국의 산업화시기에 에너지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설로서, 선탄 설비와 저탄장, 폐석장 일대가 근대산업유산으로 인정해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은 백두대간 첩첩산중 협곡에 있다. 조선 영조 무렵 기록을 보면 불과 10여 가구 70여 명이 화전을 일구며 사는 지역으로 나온다. 호랑이에게 화를 당한 사람들의 무덤을 호식총이라 하는데, 철암동 인근에는 호식총이 많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해발 고도 600m인 화전민의 땅은 석탄 채굴이 본격화되면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탄광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30년대 들어 전국 곳곳에서 탄전 확대에 열을 올렸다. 조선총독부는 남한 최대인 삼척탄광에서 본격적인 채탄을 시작했다. 삼척탄광은 1935년 무렵 삼척군에 속했던 철암에 선탄시설을 설치하고, 1939년에는 석탄을 인근 묵호항으로 실어 보낼 철암역을 짓기 시작했다. 선탄이란 캐낸 석탄에서 돌과 이물질을 걸러내고 선별·가공하는 절차다. 호환을 두려워하던 산간오지 철암은 아연 활기를 띠는 근대 탄광도시로 급작스럽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석탄을 운반할 철도도 속속 놓였다. 1940년 철암~묵호 간 철암선이 개통했고, 1944년에는 삼척~북평 간 삼척선이 부설되었다.

해방 후에도 석탄은 중요했다. 산업 에너지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취사와 난방 연료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강원도 남부의 탄광은 계속 늘어났다. 무연탄 채굴량의 증가를 보면 1930년 48만톤에서 1944년에는 450만톤으로 10배 가까이 늘어났고, 1962년에는 744만t, 1988년 2,429만t으로 증가했다. 일제강점기 통계는 남북한을 합한 수치지만, 이후는 남한만 그렇다는 얘기이므로, 석탄 생산이 얼마나 빠르게 늘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태백을 비롯한 강원도 남부의 탄광은 해가 갈수록 많아졌다.

태백시의 경우만 해도 한창 때 탄광이 40여 개나 되었다. 철도망도 더 늘어 1955년에는 영암~철암 간 영암선이 개통했고, 1963년에는 묵호~강릉 간 동해북부선이 완성되었다. 철암선을 비롯한 철도가 모두 연결되자, 영주~강릉 간 구간은 영동선이라 이름 붙여졌다.

철암역 선탄시설은 지하 갱도에서 끌어올린 석탄을 분류하고 선별·가공하여 바로 화차에 싣도록 설계되었다. 석탄을 끌어올리는 시설, 이물질을 걸러내는 침전시설, 공정과 공정을 이어주는 컨베이어 벨트, 화차에 석탄을 싣는 호퍼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선탄시설은 한국전쟁 직후에 한 차례, 1970년대 초에 다시 한차례 증설과 수선이 이뤄졌으나, 구조는 1930년대 중반 설계 그대로 유지되었다.

철암동이 속한 태백시는 1981년에 탄생한 도시 이름이다. 삼척군 소속이었던 장성읍과 황지읍을 떼 내어 만들어진 탄광도시였다. 하지만 정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한다. 세계적으로 산업 에너지원은 1960년대 말부터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가정용 연료로서 무연탄은 한동안 수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가정용 수요 역시 계속 감소했다. 결국 전성기에 40개나 되었던 태백의 탄광은 1990년대 들어 3개로 줄어들고 말았다. 태백시의 인구도 12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었다. 철암동 인구는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 왼쪽은 석탄을 보관하는 저탄장이고, 오른쪽은 석탄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이물질을 산처럼 쌓아 놓은 폐석장이다. 선탄시설, 저탄장, 폐석장을 다 합쳐 면적이 18필지 5만1,703㎡(1만5,668평)에 이른다. 한국인이 3세대 이상 살아올 수 있게 해 준 거대한 무더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커먼 모습으로 서 있는 선탄시설 속에서 광부들의 노고와 손으로 돌을 골라내던 광부 아내들의 피와 땀을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산업화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박 느낄 수 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현재도 여전히 가동되면서 석탄을 생산하고 있다. 석탄 수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석탄박물관이라 불리는 태백 철암역두 선탄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역사와 철암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국내 최대의 탄전지대인 태백, 그 중에서 철암동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석탄산업사의 상징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석탄산업은 석유와 함께 20세기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국내 광산을 일제 조사한 후 광업권을 일본회사에 넘겼으며 1930년 이후 자원 수탈을 본격화하며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평양 인근의 무연탄과 함북의 갈탄이 개발되었고, 1930년대에 화순, 영월, 삼척, 은성탄광 등이 개발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저탄장인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이 있는 삼척탄광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조선총독부가 개발한 남한 최대의 무연탄광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되고 있는 탄광은 모두 5개소로 강원지역 4개소와 전남 화순탄광만이 가동되고 있다.

폐광 1번지 철암동

‘검은 노다지’ 라고 불리던 무연탄이 산처럼 쌓여있는 철암동은 태백지역의 무연탄을 전국 각지로 보내던 국내 최대의 무연탄 발송역, 철암역이 있는 곳이다.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40년 철도가 개통되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 철암은 동네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 전해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탄광도시였다. 태백지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고 부촌이었다는 곳도 철암이었다고 한다. 1960~1970년대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오던 철암동은 주거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주민들은 철암천 하천변에 지지대를 세우고 일명 까치발건물이라는 주거용 주택과 상가를 지어서 부족한 공간을 해결했다. 까치발건물은 그 시절 석탄산업의 호황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철암만의 특별한 도시건축이다. 1980년대 철암동은 3만 여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국내 탄광촌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정책 시행과 1993년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었던 강원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인구 3천여명만 남는 폐광촌으로 전락하며 시간이 멈춘 침묵의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탄광촌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임길택의 교단일기에 실린 어린이의 시다.

태백시 황지동 연화산 기슭에는 ‘순직 산업전사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1975년 제막된 위령탑 앞에서는 매년 10월1일 탄광에 목숨을 묻은 광부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린다. 위령탑에는 당시까지 파악된 순직자 1,703명을 포함해 모두 3,022명(2019년 9월 현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국내 최초, 최대의 무연탄 선탄시설

철암역두 선탄장의 주요시설은 ①원탄저장 및 운반(벨트 콘베어), ②경석 선별 및 파쇄운반, ③1.2.3차 무연탄 선탄, ④이물질 분리(침전), ⑤각종 기계공급 및 수선창 등 5코스에 걸쳐 이루어지며 20개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선탄장은 콘크리트 구조와 강재를 사용한 지붕틀(truss)을 사용하는 등 근대 재료와 공법으로 만든 석탄산업의 대표적인 건축사례로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이다. 일제강점기 석탄산업시설의 원형을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석탄산업발전사를 증거하는 산업건축 유적지로 시대와 지역을 상징하는 곳이다.


소외된 공간의 부활과 근대산업유산의 보존

석탄산업 사양화의 찬바람이 몰아친 1980년대 후반부터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떠나고 외지인의 발길까지 뚝 끊겼던 철암동은 2013년 백두대간 협곡열차 V트래인과 중부내륙 관광열차인 O트래인이 운행되면서 방문객이 늘고 있다. 또한 철암만의 독특한 풍경을 간직한 까치발 건물을 중심으로 과거의 기억과 문화를 되살린 탄광역사촌을 조성하여 제2의 변화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까치발 건물


공식적으로 지정, 기록되고 있는 것만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니다. 그 시절 국가와 지역경제의 초석이 되어 준 이름 모를 광부의 역사가 쌓이고, 가족을 위해 살다 간 아버지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철암의 숨터, 그 모든 것이 역사이고 유산임을 알아야 한다.
태백시에서는 폐광지역 재생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세트장을 복원하고 문화관광상품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에는 등록문화재 지정 면적을 원래 지정규모보다 5배가량 넓혔다. 안전문제로 선탄시설에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다가 2019년 6월 말부터 부분적으로 개방되었다. 일반인도 선탄시설 안에 들어가 공정을 견학하고,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철암역 앞에는 철암탄광역사촌(태백시 동태백로 404)이 조성되어, 당시 탄광 마을의 생활사를 둘러보는 일이 가능하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바람의 전설’ 촬영지이기도 한다. 철암역에서 북쪽에 위치한 한보탄광(태백시 통골길 112)은 2017년 인기를 모았던 TV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극중 배경이었고, 세트장이 설치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유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현명한 고민과 실천이 소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느린 걸음으로 그곳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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