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에 길을 나서다

수많은 산사를 찾으며 해탈을 염원했던 수도승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선다.

만추(晩秋)에 길을 나서다

산사의 길


토속신앙 일색이던 삼국시대 당시, 불교는 지배 세력에게 매우 구미에 당기는 신흥종교였다. 그들은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숨기고 불교를 통합하여 수용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진리 탐구와 해탈에 이르는 길이 그것이다. 수많은 산사를 찾으며 해탈을 염원했던 수도승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선다.


00.감로천에 반영된 법주사 전각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진행하는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이 문화유산을 방문할 수 있도록 홍보한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에서는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을 지역과 특색에 따라 묶어낸 일곱 가지의 길(문화유산 방문코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일곱 가지 중 마지막인 '산사의 길'로 안내하고자 한다.



법이 머무르는 곳, 속리산 법주사

한반도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충청북도 보은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다.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자, 영토를 확장하려는 신라에겐 이곳이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반드시 차지해야 할 노른자위였다. 보은은 빼앗으려는 신라와 지키려는 백제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국경 분쟁지였다. 승기를 잡은 신라는 진흥왕 14년(553)에 국경지대인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였다. 당시 불교는 선진 종교였으므로 절을 창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국의 문화적, 군사적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던 터라 문화적으로 뒤처졌다는 약점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법주사(法住寺)는 ‘법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유래는 절을 창건한 의신이 인도에서 돌아와서 나귀에 불경을 싣고 다니며 석가의 말씀을 전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신이 한창 말씀을 전하던 어느 날 나귀가 끄는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의신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법이 머무르는 곳으로 보였다고 한다.

01. 만추에 산사를 찾으면 고즈넉한 운치가 있다.

02.고색창연한 팔상전의 공포다고



속세를 뒤로하고 부처의 나라에 들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부분의 산사가 그렇듯 법주사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3점, 보물 12점을 비롯해 총 43점에 이른다. 그 중에는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보은 속리 정이품송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너비 4.77m이다. 한낱 소나무에 오늘날 장관급에 달하는 정이품 벼슬이 내려진 이유는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하며 생긴 일화에 있다.

소나무 가지가 가마에 걸리려 하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라고 말하자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위로 들어 올려 가마가 무사히 지나갔다고 한다. 또 세조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러한 이유로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이품의 높은 벼슬도 각종 재해는 막지 못하여 이전의 아름다운 풍모는 사라지고 버팀목에 의지해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이품송을 지난 뒤 상가 밀집 지역을 벗어나면 속리산조각공원을 마주한다. ‘오리숲길’로 유명한 걷기 좋은 길이 이곳에서 시작해 법주사까지 이어진다. 오리숲길이란 상가 밀집 지역에서 법주사까지 거리가 10리의 절반인 5리 정도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숲길 한편에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다. 오늘날에야 건강을 위해서 애써 걷기 좋은 길을 찾아 걷지만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흙길이 전부였을 터. 옛길과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억하는 것은 노거수뿐이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 앞에 서면 이전과 사뭇 다른 기운에 휩싸인다. 본격적인 부처의 나라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세와는 잠시 이별을 고하고 발걸음을 옮겨 볼 일이다. 숲길 사이로 작은 시내가 있다. 부처의 나라에 입성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고 들어오라는 뜻이리라. 곧은 숲길 뒤에 단정하게 자리한 금강문이 단풍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금강문 뒤로 사천왕문과 팔상전이 네모난 상자를 겹쳐놓은 듯 선명하다. 팔상전 뒤로는 쌍사자석등, 사천왕석등, 대웅보전이 이어진다.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이들 전각은 마치 왕의 권위가 느껴지는 궁궐을 보는 듯하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속세가 아닌 부처의 나라가 아닌가. 사천왕문에 들자 험상궂게 생긴 덩치 큰 네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본다. 각각 비파, 여의주, 칼, 탑을 들었다. 이들 사천왕상은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색이 매우 화려하고 표정 또한 사실적이다. 도료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절만큼은 화려한 색으로 치장했다. 왕이 있는 궁궐처럼,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해야만 한다. 부처의 나라는 인간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극락이 아니던가.


03.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다.   /   04.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빛바랜 목탑의 아우라에 취하다

사천왕문을 나서자 눈이 휘둥그레지고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빛바랜 목조 건물이 이토록 위엄 있게 보이다니. 이전까지 봐왔던 화려한 단청은 오간 데 없고 고색창연한 건축물에서 오랜 세월의 역사가 느껴진다.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에 쉬이 눈을 뗄 수가 없다. 바로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이다. 흔히 사찰의 탑이라면 석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목탑이 생소한 탓이다. 하지만 고대의 탑은 목탑이 상당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목탑이 전해왔다고 한다.

다만 목탑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한 까닭에 대부분 사라졌으며,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이다. 팔상전(捌相殿) 현판은 오랜 풍파를 지나온 탓에 퇴색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현 팔상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목탑은 석탑보다 다루기 쉬워 고층으로 쌓을 수 있으며 크기도 훨씬 웅장하게 지을 수 있다. 또 실내에 예불이나 기도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팔상전 역시 이런 특징을 잘 반영했다. 겉으로 보기엔 5층이지만 내부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한 통층이다. 내부 가운데 벽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팔상도는 석가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이다. 팔상도 앞 불단에는 불상이 있고 그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자리한다. 재미난 것은 팔상도를 모두 보려면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자신도 모르게 탑돌이를 하게 된다.

팔상전을 지나면 대웅전 방향으로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마주한다.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선 모습이다. 사자의 갈기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석등 가까운 곳에 보물 제15호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이 있다. 이 석등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 석등 뒤에는 법주사의 핵심 전각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이 있다.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하였다. 면적 562㎡(약 170평), 높이 18m가 넘는 대규모 다포식 중층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손꼽힌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1층 건물이 눈에 띈다. 보물 제916호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이다. 지붕이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으로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산하기 위해 기둥 위에 짜임새를 만들었는데 빈틈없는 균형미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물천장으로 마감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찾는 이를 반긴다. 이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 제1361호다.

이처럼 법주사는 수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다. 그 가운데 압도적으로 시선을 끄는 게 있다면 단연코 금동미륵대불이다. 높이 약 25m에 이르는 거대한 입상으로 최초의 불상은 신라 혜공왕 때 진표가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그렇게 천여 년의 세월을 지켜오다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해 당백전의 재료로 사용하여 훼손되었다. 지금 것은 1990년 청동대불로 세운 뒤 2002년에 금을 덧입힌 것이다.

05. 보물 제1311호 순천 선암사 대웅전 ⓒ한국관광공사 김지호

06.보물 제400호 순천 선암사 승선교 ⓒ셔터스톡

07.송광사 전경 ⓒ한국관광공사 신승희

08.보물 제302호 순천 송광사 약사전(우) 보물 제303호 순천 송광사 영산전(좌)



순천 조계산에 자리한 천년고찰 선암사와 송광사

이맘때 산사에는 만추의 정취가 깊다. 여기저기 좋은 숲과 산사가 많지만 그 가운데 순천의 조계산 기슭을 찾아보자. 대한민국 100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조계산 도립공원은 주봉인 장군봉을 중심으로 수림이 울창하여 산세와 경관이 빼어나다. 게다가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까닭에 명찰과 명산이 만나 그윽한 멋과 향이 산 전체를 휘감아 흐르는 듯하다.

해마다 2월이면 동장군이 물러가길 학수고대한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앞다퉈 소개되는 것이 고매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수줍게 피어나는 선암매(仙巖梅)다. 선암매의 그윽한 향기는 천년 고찰 선암사를 에워싸듯 품어 안는다. 탐방객은 그 향기에 취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재건과 중창을 통해 거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거의 불타버렸는데 이후 중수와 중창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선암사는 이른 봄이나 만추에 찾는 게 좋다. 선암사 가는 길에 마주하는 숲길에서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단풍을 원 없이 마주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계곡을 따라가다가 무지개다리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무지개다리는 보물 제400호인 순천 선암사 승선교다. 선암사는 승선교 이외에도 보물 제1311호 순천 선암사 대웅전, 보물 제1185호 순천 선암사 동 승탑 등을 보유하고 있다.

선암사와 함께 조계산에 터를 잡은 송광사는 절을 언제 세웠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단지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에서는 귀하고 값진 세 가지 보배를 삼보(三寶)라 한다. 이 삼보를 상징하는 사찰이 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 사찰 통도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모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우리나라 불교의 승맥(僧脈)을 잇는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가 이에 해당한다. 송광사는 여느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참선 수행을 으뜸으로 여기는 까닭에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마저도 수행에 방해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만큼 송광사를 찾는다면 발걸음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송광사에도 여러 문화재가 있는데 그중 챙겨 볼 것은 국보 제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보물 제1368호 송광사 영산전 후불탱·팔상탱이다. 두 문화재 모두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불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여유가 있다면 송광사에서 불일암에 이르는 무소유 길(왕복 1.2km)을 걸어보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살다간 승려이자 수필가인 법정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70% 이상이 산지이고 그 산지에는 어지간하면 절이 있다. 우리가 불교문화에 익숙한 이유이다. 그런데도 특별한 목적 없이 절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한해를 정리하는 기분으로 산사가 있는 숲길을 걸어보는 일만큼 매력적인 휴식도 없다는 점이다. 가식을 모두 떨어트린 자연의 모습을 보며 지난 시간을 되짚어보자. 만추에 이만 한 여행도 없을 것이다.



여행 정보


# 속리산 문장대

속리산은 보은군과 상주시 경계에 놓인 해발 1,033m의 명산이다. 문장대는 속리산의 한 봉우리로 이곳에 서면 속리산 아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늘의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이라 해서 ‘운장대(雲藏臺)’라 부르기도 한다.


# 말티전망대

구불구불 이어지는 구절양장 말티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온 산을 뒤덮어 숲과 도로가 어우러진 풍광에 색을 더한다.


# 솔향공원

소나무홍보전시관이 있는 솔향공원은 소나무를 주제로 조성된 공원이다. 야외에는 공원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스카이바이크 시설이 있다. 공중에 있는 레일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나무 사이로 갈 수 있어서 독특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산사의 길 탐방 코스 ➊ 공주 마곡사 - ➋ 보은 법주사 - ➌ 해남 대흥사 - ➍ 순천 선암사 - ➎ 순천 송광사 - ➏ 양산 통도사 -➐ 영주 부석사 - ➑ 안동 봉정사 - ➒ 합천 해인사  출처/임운석(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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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