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원들과 북한의 만행

남로당원들과 북한의 만행  

1946년 1월 15일 발족된 국방경비대 는 친일파와 남로당원들이 뒤섞였다.


▲ 반란군 측에 가담하여 체포된 국군들

1948년 제주 4. 3 사건과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남로당원 숙군과정에서 4,749명 숙청, 5,568명이 탈영했다. 전군 98,000여 명 중 10%, 한 개 사단 병력이 좌익 공산세력이었던 셈이다.
강동정치학원 인민유격대가 1948년 11월~1950년 6월, 5차례 남파하여 국군과 전투를 치렀고, 2년 동안 유격대 2,450명이 남파됐다. 1949년 38선에서 대부분 북한 도발에 의해 874회 전투가 벌어졌다. 육사 전신 ‘군사영어학교’에도 친일파와 좌익들이 뒤섞였다.


▲ 남로당 당수 박헌영(예산)과 김일성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금산), 남로당 김삼룡(충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울산), 남로당 재정부장 성유경 (창녕)

◆ 잊혀진 사건들을 새삼 들추어 본다.


김정일 장인 창녕 대지주 집안 성유경은 큰딸 혜랑 작은딸 혜림을 두었다. 즉 독살된 김정남의 외조부다. 성혜랑의 수기를 통해 가계도가 밝혀졌다.


▲ 이한영(1960~1997,본명 이일남) 성혜랑 아들, 이모부 김정일, 한양대 연극 영화과, KBS러시아담당PD, 분당 서현동 시범단지 현대아파트 418동 14층 현관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피살.


▲ 김일성 직속라인 고정간첩 성시백

1948~1950년 5.30 총선까지 맹활약했다.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을 경영하며 합법적으로 공산당 선전을 했다.

프락치를 심어 국군의 기밀을 탐지하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을 고립시키는데 주력했고, 남북교역으로 큰 돈을 벌다가 남북교역이 막히자 북로당 직영 칭다오 조선상사를 통한 무역으로 막대한 공작금을 벌어서 민주국민당 후보들에게 미화를 살포하는 적극적 정치공작으로 112명이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 몇 대 없어 정말 소중했던 L-5항공기

● 1948년 11월 18일, 육군 항공대 소속 백흠룡 중사가,
● 1949년 11월 23일 이명호 소위가 L-5를 몰고 거듭 월북했다.


● 춘천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
제 2 대대장 강태무, 두 사람은 1925년생 경북 고성 고향 친구다. 1949년 5월 5일, 북한과 내통, 훈련을 빙자하여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했다.




▲ 국제적으로 대서특필된 별난 사건.


▲ 북한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 강태무 부대 정승화는 “나도 훈련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강태무 소령이 “너는 부대에 남아 있어라”하여 못갔다. (참모총장 이응준, 채병덕으로 교체)


▲ 79년 10.26때, 육참총장(육사5기)


▲ 영화 <포화 속으로>에 빅뱅의 탑과 권상우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민군 해병대 766부대의 지휘관이 강태무다.



한국전쟁 중에 남한의 부인과 형제들을 찾아내 북한으로 데려가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는 등 인민군 장성으로 최상의 영광을 누리다 죽었다.


❏ 대한민국과 육사2~3기들 ❏

먹이사슬 같은 동향. 동기생들의 유별난 삶을 자신들은 스스로 애국자라고 했다.

○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자들 박임항(1기), 박정희(2기), 3기 중국인, 장은상(4기), 강문봉(5기)


남로당원 박정희를 처형의 문턱까지 끌고 갔던 김창룡.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고향(경북 선산) 선후배다.
이승만 아바타 "김창룡 암살사건"배후 로 사형선고 받은 강문봉은 4.19혁명 때 풀려나 박정희 군정반대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1982년 6천억 원대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전두환 장인 이규동.

▶ 표무원. 강태무. 박정희. 김재규. 강문봉. 이철희. 이규동 모두 육사 2기.

▲ 여순사건 '여자 빨치산 조경순'의 남자 김지회와 김창룡은 육사 3기.

○ 대한민국 육군 군번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번 장석륜, 5번 정일권. (유재흥은 7사단, 2군단, 3군단을 궤멸시켰다.)


● 돌아오지 못한 킴 볼 스미스호

1949년 9월 20일, 소금 1,800t을 싣고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가던 스미스호가 실종됐다. 선원과 미국 고문관 2명, 해양대학교 졸업생, 수산고 실습생 등 6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선장 안관제와 동생 안장제가 주도하여 진남포 항으로 피납되었지만 실종된 배의 행방은 짐작 뿐, 더 알 수가 없었다. 모두 강제로 인민군에 입대시키고 배는 남포호(함장 안관제)로 개명하고 북한 해군으로 편입했다. 권순혁과 김모, 박모씨가 탈출, 나진의 방공호 속에 숨어 있을 때, 권순혁은 미군 폭격으로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어머니~어머니"를 외치다가 숨졌다.
돌아온 두 사람에 의해 피납 전모가 밝혀졌다. 김모씨는 해양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박모씨와 김교수는 평생 중정의 감시와 연좌제로 고생했다.


▲ 1949년 12월 3일, 육본 작전교육국 항공과 광주파견대 조종사 국영암 소위 L-19형 연락기를 몰고 월북했다.



● 의정부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 6월 25일 오전 9시에 운현궁에서 가짜 결혼식을 알리고 작전과장과 함께 도주.

비상이 해제되자 결혼식 참석을 겸해 공병대원들이 서울로 외출을 나왔다. 이 때문에 동두천~의정부, 양문리~ 의정부 구간의 교량폭파, 장애물 설치 등을 못하여 아군의 타격이 막대했다.


● 채병덕 참모총장 부관 라엄광 중위는 장교 병적부에도 없는 남파간첩 남로당 원으로 밝혀졌다.

▲ 1958년 2월 16일 대한국민항공사 KNA여객기 ‘창랑호’ 최초 납북사건

오전 11:30 부산수영~여의도 착륙예정 의 DC-13 창랑호가 북한 평양 순안국제 공항으로 피납되었다. 납치범들은 평택 상공에서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치고, 칼빈과 엽총으로 미군 군사고문단원 중령을 사살하고, 조종사를 협박하여 납북했다.

▲ 동아일보 창랑호 피납기사



승무원 3명, 승객 28명과 납치범 7명 등 총 38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최초의 민항사 KNA 기장과 부기장은 미국인, 독일인 부부, 국회의원 유봉순, 공군정훈감 김기완 대령도 탑승했다.


북한은 3월 6일, 26명을 판문점으로 송환하고 나머지는 귀순을 주장, 기체는 억류했다. 중공 주은래 총리의 방북을 앞두고 체제 선전을 위해 꾸민일이었다. 적자에 허덕이던 창업주 신용욱 대표는 1961년 7월 한강에 투신자살 하고, KNA는 1961년 11월 13일 폐업됐다.


▲ 1958년 빠르고 안전한 KNA광고

● 1969년 12월 11일 KAL기 납북

KAL YS-11 국내선 쌍발여객기 승객 47명, 승무원 4명 탑승, 강릉~ 서울, 12:25 이륙한 지 14분 만에 대관령 상공에서 고정간첩 조창희가 피납하여 원산시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자진월북으로 우기던 북한은 1970년 2월 14일 판문점으로 12명을 제외한 39명을 송환하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최덕신 전 외무장관 아들 최인국도 월북…北 “영주할 것” / KBS뉴스(News)
6.25 전쟁 이후 최고위급 월북자였던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차남, 최인국씨가 어제(6일) 월북했습니다. 북한에 영구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요, 통일부는 방북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며 구체적인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보도에 유지향 기자입니다. [리포트] 평양 국제공항에...


●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월북한 최덕신(1914~1989)은 제1군단장 (중장 예편), 외무부 장관, 서독 대사, 통일원 고문,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 등을 지낸 후 박정희와 갈등으로 미국으로 망명했었다.



♥️ 이랬던 우리 군이 세계 6위, 육군은 세계 4위, 해병대는 세계 2위, 군단 단위로는 제 7 기갑군단이 세계 최강이다. 가공할 신무기로 자주국방을 선도하며 불철주야 노고가 많은 국방과학연구소 에 힘찬 응원의 갈채를 보낸다.  자료출처/박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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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