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보듬은 종교 시설 - 목포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절에서 교회로, 그리고 문화센터로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공간으로 읽는 근대문화 역사유산

목포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
삶을 보듬은 종교 시설

절에서 교회로, 그리고 문화센터로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공간으로 읽는 근대문화 역사유산


전라남도 목포시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은 일본 불교 사찰에서 한국 사찰로, 다시 한국의 교회로, 문화센터로 운명이 바뀐 흔치 않은 사례다. 일본 정토진종의 동본원사는 목포 개항 이듬해인 1898년 목포에 지원을 설치했다. 목포지원은 곧 목포별원으로 승격했고, 1905년 현재의 위치에 목조 법당을 지었다가, 1930년대 초 석조 법당을 건립했다. 지붕이 높고, 일본 전통 사찰의 외양을 간직한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해방 후 정광사라는 한국 불교의 사찰이 되었다. 정광사는 정광중학교를 탄생시키는 등 교육에 힘썼다. 목포역 인근이라 주요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1957년 정광사는 목포중앙교회에 넘어갔다. 불교 사찰이 기독교 예배당이 되는 희귀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목포중앙교회는 유신 시절부터 5·18,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목포 민주화 운동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목포중앙교회가 2008년 이전한 뒤 2010년 지역의 문화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구 동원본사 목포별원 안내문


전라남도 목포시 무안동 오거리문화센터는 원래 일본 불교의 포교당으로 지어졌다. 해방 후 10여 년간 한국 불교의 사찰로 변했다가 1957년 소유권이 교회로 이전되었다. 예불이 이뤄지던 장소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근대가 도래한 이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감안할 때 경이로운 일이라 할만하다. 반세기 동안 목포중앙교회로 불리던 건물은 교회가 2007년 이전한 후 우여곡절을 거쳐 문화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구 동원본사 목포별원


일본 정토진종이 목포에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지원(支院)을 설치한 해는 1898년이다. 목포가 개항 당한지 1년 뒤다. 정토진종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의 주요 종단은 1877년부터 앞다퉈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불교는 조선 침략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자임했다. 일본 불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융합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았다.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가 목포에 지원을 둔 이유도 명백했다.

동본원사 목포지원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에 자리 잡았다. 목포지원은 곧바로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열었다. 일본인 자녀 교육기관인 목포심상소학교가 지금의 유달초등학교의 시작이다. 목포지원은 1905년 현 위치(당시 지번으로는 무안통 4정목)에 법당을 지었다. 1907년 목포지원은 목포별원으로 한 등급 높아졌다. 원래 법당은 일본 전통 사찰과 마찬가지로 목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별원은 1930년대 초 목조 법당을 현존 형태의 석조 건물로 개축했다.

                                                                    구 동원본사 목포별원 뒷문


구 동원본사 목포별원 외관

구 동원본사 목포별원 벽면



건물 본체의 높이가 5.5m인데, 지붕은 7m나 된다. 한눈에 일본 사찰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화강암을 쌓아 올린 석조 건물인데도, 장식은 일본 목조 사찰의 세부를 살리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채로운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은 해방이 되자 한국 불교의 정광사(淨光寺)가 되었다.

정광사는 해방 직후 무엇보다도 시급한 ‘교육 불사’가 이뤄지는 중심 역할을 했다. 호남의 5대 사찰(백양사, 대흥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가 출자하여 정광중학교가 설립됐다. 정광중학교는 정광사 자리에 있다가 1948년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으로 옮겨갔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정광사는 목포 불교의 중심 공간으로 여겨졌다. 목포역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는 정광사는 큰스님들이 목포에 들렀을 때 설법을 하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1957년 정광사가 돌연 목포중앙교회에 건물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불교 사찰을 인수해 기독교 예배 처소로 삼은 사례는 희귀하다. 어떤 연유로 목포중앙교회가 건물과 공간을 인수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목포중앙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1923년 설립한 교회로 1934년 죽동에 예배당을 세웠다. 1957년 불교 사찰, 그것도 일본식 불교 사찰을 매입한 목포중앙교회는 법당을 교회로 단장했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일본식 박공(가라하후)에 십자가를 걸었다. 목포중앙교회는 2008년 옥암동으로 신축 이전하기까지 정광사, 동본원사 목포별원 법당을 교회로 사용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일본식 박공에 목포중앙교회 시절 걸었던 성경 문구가 선명하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구약성서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일부다.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올리던 간구도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섬기는 신은 엄연히 다르나, 같은 공간에서 한 세기 가까이 엎드려 기도한 불자나 기독교 신자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청은 2007년 구 동원본사 목포 별원을 등록문화재 340호로 지정했다.


목포중앙교회 시절 이 공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모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교육관으로 쓰인 지하 1층에서 목포 지역 목회자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인물들이 뜻을 모으고, 대응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유신 시절부터 1980년 5·18 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까지 중요한 결정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기념표지석이 마당에 서 있다. 2008년 교회가 옮겨 가자 잠시 철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손질하여 문화센터로 쓰기로 했다. 2010년 오거리문화센터가 된 공간에서는 이제 독경과 설법, 찬송가와 설교 대신 문화공연과 전시회가 열린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