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통해 사회와 국가를 구원하려고 한 니치렌(日連)

니치렌은 법화경을 기반으로 한 법화불교를 주창한 일련정종의 창시자로, 오늘날까지 일본 종교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불교를 통해 사회와 국가를 구원하려고 한 니치렌(日連)


                                                                                     니치렌(日連)


니치렌(日連)
니치렌은 법화경을 기반으로 한 법화불교를 주창한 일련정종의 창시자로, 오늘날까지 일본 종교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일본은 삼론(三論),  법상(法相),  화엄,  율(律),  성실(成實),  구사(俱舍),  천태(天台),  진언(眞言),  선(禪),  정토(淨土),  진(眞),  시(時) 등 열두 종파가 각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13세기는 불교가 최고로 번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느 때보다 불교가 발전하고 확산된 시기였다.

니치렌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러 종파를 연구한 끝에 법화경의 가르침만이 진정한 교리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는 "법화경이야말로 정법이며, 정법을 비방하는 염불의 신심을 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타 종교를 배척하는 과격한 주장을 펴 유배와 피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니치렌은 1222년 아와국(치바 현 아와 군)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두 살 무렵 고향의 세이쵸지(淸澄寺)로 출가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 평민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출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젠(道善) 아래에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했으며, 4년 후 정식 승려가 되어 '렌쵸(蓮長)'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가마쿠라, 교토, 히헤이 산 등지의 사찰에서 수행하면서 밀교,  천태종,  선종,  염불종 등 다양한 종파를 연구했다.

당시 일본 불교는 종파가 구분되어 있었다 해도 교리 면에서 서로 뒤섞여 있고, 단지 제도적 측면에서 분파되어 있는 경향이 컸다.  천태종이라 해도 여러 종파의 교리가 혼합되어 있었던데다 의례적인 부분에서는 진언종의 영향을 받는 등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니치렌은 이런 상황에 의문을 품었다. "각 종파들은 다른 모든 종파를 비난하고, 자신만이 불교의 근간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두 개의 길이 있을 리 없다.  그럼 이 같은 종파의 분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연 내가 좇아야 할 부처의 길은 무엇일까?"

그는 각 종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잘못된 신앙 때문에 사회적 불안이 야기되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그의 눈에는 승복을 걸친 채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고, 승려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으며,  미신적 주술로 민중들을 현혹하고,  교단 내외에서 정치 싸움을 일삼는 승려들의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다.  그는 석가모니의 설법이 가르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 분파된 불교 종파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궁극적인 가르침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오랜 배움 끝에 천태종의 최고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을 신봉하게 되었다.


                                                                                         니치렌의 《법화경》



니치렌의 《법화경》
1253년 고향으로 돌아간 니치렌은 자신만의 종파를 개창하고 거리에서 설법을 시작했다.  는 다른 모든 종파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것이 민중을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른 교리들은 법화경에 담긴 부처의 궁극적인 가르침에 도달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화를 정법(正法)로 여기고, 이 법을 세움으로써 다른 종파들을 제거하고 사회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겼다.  천재지변, 기근, 전염병 등이 횡행하는 것 역시 바른 법(正法)인 법화경을 소홀히 하고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름을 '니치렌(日蓮)'이라고 개명했는데,  니치(日, 태양)는 근본을 의미하며,  렌(蓮, 연꽃)은 법화경을 지칭한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법을 수행하면 부처로 거듭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수행법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만다라로 그려 불공을 올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법화경에 귀의한다)'라는 진언(眞言)을 정성껏 외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불교가 단순한 참선이나 개인적인 구원에 그쳐서는 안 되며 사회와 국가, 세계를 구원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제도와 법률, 정치에도 관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현대 일본의 많은 불교 분파들은 그의 교리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니치렌 종단의 한 분파인 창가학회(創價學會)가 공명당(公明黨)을 창립하여 정계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이런 입장이 주효했다.

                                                                               《입정안국론》



《입정안국론》
그는 다른 종파를 모두 배격하고, 적극적인 포교 방식을 취했다.  그의 포교법은 '파절굴복(破折屈伏)'이다.  이는 상대방이 잘못된 생각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분명히 깨우쳐 주고, 바른 것을 바르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리 설법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불법을 전수하고, 나아가 다른 종파의 사찰에까지 찾아가 포교 활동을 했다.

그의 과격한 포교 방식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른 종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때문에 그는 다른 종단은 물론, 지역 영주들에게도 박해를 받으며 평생 유배와 추방을 거듭 당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민간에서 널리 믿고 있던 염불 신앙을 비판하는 바람에 거리에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유배되는 니치렌



유배되는 니치렌
니치렌이 사도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훗날 일련정종의 2대 교조가 되는 제자 니치로가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서다 제지당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1268년 몽골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국이 될 것을 요구해 왔다.  니치렌은 이전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지어 막부의 실권자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에게 보낸 바 있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정과 국민이 사교(邪敎)를 믿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으며,  다른 종파를 없애고 자신의 교리를 국교로 삼지 않는다면 결국 나라가 무너지는 위험에 처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몽골 사신이 오자 그는 자신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여기고 이 책을 막부를 비롯해 주요 불교 종단들에 보냈다.  이는 기성 불교계를 자극했고, 1271년 니치렌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러나 마지막 순간 감형되어 사도 섬에 유배되었다.

니치렌은 이런 역경조차 법화경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였고, 유배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포교를 계속했다.  이때 집필한 《개목초(開目秒)》에서 그는 고난을 극복하는 체험 자체를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법화 행자' 개념을 창안했다.  그리고 3년 후 영향력 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니치렌은 막부에 몽골의 침략과 관련된 자신의 사상을 여러 번 간언했으나 끝내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이에 분개하여 미노부 산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쓴 주요 저작으로는 《찬시초(撰時抄)》,  《보은초(報恩抄)》 등이 있다.

오랜 고난으로 건강이 차츰 악화된 니치렌은 1282년 닛쇼(日昭),  니치로(日朗),  닛코(日興),  니코(日向), 닛쵸(日頂),  니치지(日持) 등 여섯 제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니치렌의 종단은 이후 이 여섯 제자에 의해 확장되어 무사와 농민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일련종(日連宗, 니치렌종)은 일련종과 일련정종(日連正宗, 니치렌정종)으로 갈라진 후, 또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일련정종은 에도 시대와 근대를 거치면서 크게 성장하여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종단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일련정종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인 창가학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성장하여 300만 명 이상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1964년 일본 공명당을 창당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