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역사의 현장 죽주산성을 오르다.

삼국, 역사의 현장 죽주산성을 오르다.

 

일죽 IC에서 빠져나와 안성시내로 향하는 길의 오른쪽에 죽산면 매산리가 있다. 여기에 비봉산이 있고, 비봉산을 등지고 서 있는 미륵불이 있는데 이것이 태평미륵이다. 이 태평미륵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죽산(매산리) 비봉산에 죽주산성이 있다.

죽산(매산리)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인 죽주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잘 다듬어진 산책로 같다. 죽주산성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보다는 산성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들이 길동무를 해주어 상쾌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죽주산성의 정문인 동문 

 

복원이 된 산성의 박석

 

산성의 정상부분에서 바라본  국도17호선이 지나는 영남대로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본성은 1.7㎞이고, 외성 1.5㎞, 내성 270m로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전 상태가 좋다.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 되던 곳이었다. 6세기 중반경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산성이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중성 북동쪽 2개의 능선과 계곡을 막아 외성을 축조하였다. 축조시기는 출토되는 기와편으로 보아 고려 전기(광종∼현종)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중성을 수축하고 그 안으로 내성도 축조하였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광해군)로 추정되며 성벽을 겹겹히 두어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치성에는 왜성의 축조 기법을 도입하고 포루도 설치하였다. 포루가 만들어진 산정에 올라서면 안성벌, 이천ㆍ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북벽에 있는 포루, 포루에 포를 설치했던 구멍이 보인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성을 모방하여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남쪽 성벽의 동쪽과 서쪽 끝의 치성부분에서 그 모습을 찾을수가 있다

 

죽주산성은 특히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왜군에게 내주고 말았던 죽주산성을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인 요새였던 이곳을 아군의 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나라마다, 전시 때 마다 치열하였다.

 

죽주산성 평탄지에는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시설 2기가 발견되었는데, 예로 부터 이곳은 물이 풍부한 성이었다

 

1236년(고종 23) 죽주방호별감 송문주장군이 몽골군과 15일간 전투를 펼쳐서 승리한 곳이다. 이는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다. 산성의 내성 곁에는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의 전공영각과 재실이 있다. 재실을 지나쳐 내려오면 쉼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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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