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 꾸밈을 넘어 삶을 담다

장신구, 꾸밈을 넘어 삶을 담다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몸을 치장하는 복식 생활문화의 정점에 있었기에 장식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의 분야에서 두루 사용됐다. 일차적 욕구인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장식적 역할뿐만 아니라 종교적 제사 의식을 통해 절대자와 평범한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부산물로도 사용됐다. 또한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용이며 부귀다남, 불로장생, 자손 번창, 부부 화합, 가내 평화 등의 현실적 욕망과 길상의 염원을 담은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처럼 장신구는 원초적인 미적 의식에서 출발해 주술과 종교적 의미로 이어짐으로써 각 개인의 사회적 영역을 구축하기 위한 권력의 과시나 부의 상징물로 여겨졌다.

01. 패제장신구(貝製裝身具)- 신석기 ⓒ국립중앙박물관

 

02. 환두대도(環頭大刀)환두대도란 칼의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로서, 삼국시대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문화재청

03.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으로, 외형상 주고리[主環], 중간식, 마감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상을 담은 장신구의 변천사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 생활문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 온 장신구는 세계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물로 발견된다. 특히 귀걸이는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수렵의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사냥감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귀걸이는 귓불을 강조하는 장식으로 서서 이동하는 인간을 인식할 수 있는 뚜렷한 표식으로 사용됐다.

 

이처럼 인간의 생존에 도움을 준 장신구의 등장은 신석기시대 조개팔찌가 그 시작이며 결상이식 귀걸이, 뒤꽂이, 목걸이, 발찌 등이 제작됐다. 이는 의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신체 장식을 통해 다른 종족과 구분할 수 있는 장치였으며, 권위자를 중심으로 한 힘의 과시로도 활용됐다. 본격적인 계급사회인 청동기시대에는 권위자의 신분과 사회적 역할을 상징하기 위해 장신구를 사용했다.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청동 무기류와 석기류 이외에도 옥류인 대롱옥, 곱은옥, 구슬옥 등을 활용한 목걸이와 귀걸이, 호형(虎形) 및 마형(馬形)의 대구(帶鉤)가 출토됐다. 이들 장신구는 출신 계급을 상징하는 용도와 더불어 인(仁), 의(義), 지(智), 용(勇) 등을 상징하는 물품이었다.

 

04. 나주 신촌리 금동관 (羅州 新村里 金銅冠)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 ⓒ문화재청

 

삼국시대 장신구는 신분적 제한을 두고 극히 한정적으로, 착용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장신구가 세분되면서 사치성을 띤 공예품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의 장신구는 고루 발달했으며, 투각초화문금동관(透刻草花文金銅冠), 금은단용문환두대도(金銀單龍文環頭大刀), 관모, 금제 목걸이, 과대, 팔찌, 반지 등 세련된 미적 감각을 지닌 장신구를 만들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백옥, 금은사, 공작미(孔雀尾), 비취모로 장식한 요대나 대모, 금·은으로 누금하고 주옥으로 상감한 비녀를 제작하는 등 기교성이 매우 뛰어난 장신구의 나라로 성장했다.

 

고려시대는 경제나 문화적으로 삼국시대보다는 진보된 사회로 장신구의 패용 역시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금, 은, 금동, 백옥, 수정 등의 한정된 재료를 사용해 제작했고, 중국 송·원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특유의 고유성이 상실됐다. 그 시기에는 정교한 타출기법이 발달해 은제병, 은제팔찌 등 은제가 많이 제작됐고, 금피에 금어를 달거나 붉은 뿔피에 은어를 단 허리띠, 옥지환 등의 다채로운 형태와 문양을 가진 귀족적인 장신구가 탄생됐다. 당시 군신의 각종 복식과 의례에 따른 장신구가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명의 관대(冠帶)를 거의 그대로 조정의례에 받아들였으나, 일상에서는 사대부에서 상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복과 장신구가 출현했다. 여성들도 가체(加), 비녀, 노리개, 각종 패물 등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한편, 때론 소박하고 단아한 자태의 장신구를 패용했다. 여성들은 안락한 가정생활, 수복(壽福), 부귀(富貴), 다남(多男) 등을 염원하는 수단으로 장신구를 이용했으며, 이를 통해 억압된 사회에서 자신들의 미적 욕망을 표출했다. 한복과 함께 착용하던 각종 장신구는 일제강점기와 현대화 과정에서 한복 착용이 줄면서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05.떨잠 조선시대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는 여성용 장식품으로, 떨철반자라고도 한다.ⓒ국립민속박물관 06.가체 머리를 꾸미기 위해 자신의 머리 외에 다른 머리를 덧붙이는 장식 ⓒ국립민속박물관

 

 

신분과 성별 등 다름의 상징이 된 장신구

 

이처럼 장신구는 시대와 제도의 변화 속에서 신분과 성별에 따라 여러 종류로 제작됐다. 남성과 여성은 장신구를 신체 부위에 따라 달리 착용했다.

 

남성 동곳은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상투 튼 머리를 고정하는 장신구로, 대부분 길이가 짧고 머리 모양에 따라 불두형(佛頭形), 반구형(半球形), 말뚝형 등으로 제작했다. 상투의 정상에 동곳을 박고 망건으로 고정한 후 망건에 관자와 풍잠을 달아 머리를 치장했다. 갓은 조선시대 선비의 의관으로 머리를 덮는 대우와 햇빛을 가리는 양태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햇볕, 바람, 비 등을 가리는 실용적인 쓰개였으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는 목적을 지니면서 재료와 형태, 제작 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나 고구려 〈감신총〉에 등장하는 패랭이 갓을 쓴 인물, 원성왕이 꿈에 복두(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삼국유사』 기록 등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갓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갓은 개화기인 1894년 단발령으로 중절모가 등장할 때까지 1,500년 이상 남성들이 사용한 장신구다. 갓끈은 턱밑에서 갓을 고정하는 실용적인 용도 이외에 별도로 다양한 재료의 구슬을 연결해 갓의 단조로움을 극복했다. 계급에 따라서 옥, 마노, 호박, 산호, 수정 등을 사용했고, 중앙에 구형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로 균형감 있게 장식했다. 조선시대 당상관은 융복의 자립에 산호, 호박, 대모로, 당하관은 흑립에 수정, 전립에는 납조밀화로 계급을 표시했다.

 

여성 장신구 중 떨잠은 예장용 큰머리를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보통 세 개를 한 벌로 해 중앙에 한 개, 좌우로 두 개를 배치했다. 뒤꽂이는 쪽머리 뒤에 덧꽂는 장신구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비녀는 머리를 얹거나 쪽을 찐 후 머리 모양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했다. 첩지는 쪽머리 위 가르마를 꾸미는 장신구로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장신구다.

07. 옥로립 조선시대 옥으로 만든 해오라기를 정자로 단갓으로, 고관과 외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사용했다. ⓒ국립민속박물관

08.초립 조선시대 남성들이 쓰던 갓으로, 풀이나 대오리를 엮어 만들었다. 신분에 구분 없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신분에 따라 초립을 짜는 날 수를 사족(士族)은 50죽, 서민은 30죽으로 구분했다. ⓒ국립민속박물관

09. 가락지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 ⓒ국립민속박물관

 

귀걸이, 목걸이, 팔찌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많이 착용하던 장신구로 조선시대 초까지는 활발하게 사용했으나, 중·후기에는 각종 규제가 계속되면서 사용이 제한됐다. 한편 조선시대의 가락지는 반지, 지환, 지륜 등으로 불렸으며,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녀 주로 혼인한 여성이 착용했다. 노리개는 저고리의 겉고름과 안고름에 차던 장신구로, 조선시대 이전까지 의복 구조상 허리에 요패(腰佩)로 찼으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생겨 가슴 부위에 달면서 노리개로 명명됐다.

 

삼국시대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의 금제과대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도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몽골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로 이어져 발전했다. 조선시대 장도는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고 호신용으로 사용했다. 특히, 은저(銀)가 달린 첨자도(籤子刀)는 음식의 독을 분별해 자신의 신변을 보호했고 호박과 침향으로 장도를 제작해 위급할 때 칼로 깎아 상처에 바름으로써 지혈하는 구급약의 역할도 했다.

출처/윤병화 (세경대학교 호텔관광레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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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