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의사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건국훈장, 한국으로 온다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건국훈장, 한국으로 온다

 

일본인 여성 혁명가이자 박열 의사 부인으로 일왕(日王) 부자 처단을 기도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여사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박열 의사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돌아온다.

 

 박열 의사와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지난 2017

 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재조명

 받았다.

 

 박열의사기념관은 영화 개봉 후 국민들의 지지와 새로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4월 여사에 대해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

 했고, 정부는 같은해 11월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첫 번째로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박열 의사와 가네코 여사 등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

 쓰지 변호사로, 정부는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생전의 가네코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여사 제93기 추도식 및 기념식은 오는 23일 오전 10시부터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 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 묘소에서 거행된다. 가네코 후미코 일본의 사회운동가, 한국의 독립 열사, 한국 이름은 박문자.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떠돌면서 자랐다.  10살이 된 1912년 조선으로 넘어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의 고모 집에서 기식했으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는 등 구박과 차별을 받으면서 비참한 환경에서 살았고, 이웃에게서 얻어 먹은 보리밥에 감동을 받았을 만큼 굶주렸다.  1919년 3.1 운동을 목격했는데,이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식민지의 억압받는 민중으로서의 조선인에게 공감하고, 독립적인 자아를 일깨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가네코는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아버지와의 불화로 도쿄로 옮겨 친척집에서 기거했다.  그녀는 신문배달과 가게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잇는 가운데 구조적으로 현실을 타개하는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어교습소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도쿄에 머물던 많은 조선인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공부했다.  그녀는 결국 무정부주의에 이끌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흑도회' 의 성립을 주도하고 기관지인 〈흑도>를 펴냈다.  이 시기의 그녀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모두를 거부한 채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에 관심을 가졌고, 입장이 유사한 식민지 민중의 삶에 대해서 공감했으며, 억압의 주체인 국가 권력과 기존 체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19살 때였던 1922년 조선의 사회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의 만남은 그녀의 삶에 큰 전기가 되었다.  그녀는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박열에게서 강렬한 정신적 동료애를 가졌다. 

 

개새끼/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불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일왕에 반대하여 조선 민족과의 공동 투쟁을 선언했으며,  박열과 동거에 들어갔다.  그들은 1923년 4월 아나키스트 단체인 불령사(不社)를 조직했는데, 그해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후, 일본의 군경이 재일본 조선인들을 검거했을 때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취조 중, 박열이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무장투쟁의 하나로 일왕 일가에 대한 폭탄 테러 계획을 세웠던 것이 밝혀졌다.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3일 옥중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으며, 이틀 뒤인 25일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정의감에 감동한 판사에 의해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박열은 이치가야(솜) 형무소로, 가네코는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녀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된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부했으며, 옥중 생활을 하면서 많은 수기를 썼다.  그녀는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23세의 나이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유골은 박열의 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 의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팔영리 주흘산 자락에 묻혔다. 

 

박열의사기념관이 건립된 후, 그 옆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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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