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왕국 조문국을 다녀오다.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에 있었던 삼한 시대 초기 국가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라고 하는 삼한 시대 초기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읍지(邑誌)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조문국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벌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되어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 중에서 일정 이상의 정치성을 띤 집단의 존재를 나타내어 주는 것이 고인돌 유적이며, 정치적 지배자의 존재와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 청동기 유물이다. 경상도 지역에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의 한강 유역에서 내려온 무문 토기 계통의 문화를 영위하던 이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유이민들은 좋은 기후 조건 아래 농경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고인돌 축조가 가능하였다. 이들 고인돌 축조 계급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경에 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수입한 청동기를 소유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치 집단의 형성이나 정치 권력의 성장 면에서 충청도·전라도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다. 이 당시의 경상도 지역에서는 청동기를 다량으로 소유한 집단이 나타난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대된 지배 권력의 성장이나 지배자의 대두를 이 지방의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며 고인돌의 주인공이 이 지방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지배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1세기경 경상도 지역에서는 위만 조선 계통의 유이민들이 마한 지역의 강력한 선주 집단의 세력 기반을 피하여 정착함으로써 이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 집단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이 주위의 단위 집단을 통합하게 되면서 대구·영천·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 소국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조문국도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의성 지역 내 선사 유적은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서부 지역과 동남쪽의 쌍계천 유역, 북부 미천 유역의 크게 세 군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도 이 세 하천 유역 구릉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주변에 260여 기 이상의 고분이 함께 분포한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서는 이들 3곳의 고인돌 분포 집단이 초기 국가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 전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중심지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조문국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조문국의 중심지는 금성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조문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 소국의 수장은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이며 이들은 국읍에 존재하여 읍락을 통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 읍락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사로 육촌과 가락 구촌 등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국에는 제천 의식을 주관하던 천군(天君)’이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에 보이는 관가의 존재는 일정 정도의 지배 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서 관리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며, 축성 등의 일들이 있을 때 여기에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소국의 신분 구조는 주수(主帥), 천군(天君), (), 하호(下戶), 노비(奴婢) 등의 계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문국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문국도 경상도 일대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읍과 다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국읍은 용어 그대로 나라의 중심 읍락’, ‘대읍락인데 앞에서 이야기한 금성면 일원일 것이다

 

2세기 말 국읍 중심의 내부 결합을 바탕으로 군대 조직을 재편한 사로국은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신라 본기에 "벌휴왕 2(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조문국이 위치한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다. 경주의 사로국이 이곳을 장악하여 조문군으로 삼으면서 일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고, 북방에서 정치 변동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남하하여 내려오는 유이민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조문군은 757(경덕왕 16)에 진보(眞寶)[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비옥(比屋)[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현(安賢)[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단밀(單密)[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4개 현을 속현으로 가진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문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읍지에는 현재의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그곳이 조문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기자의 고향인 경북 의성은 지난해 2월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영미~영미로 유명한 컬링의 메카다.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한 의성군은 동쪽은 청송군, 서쪽은 상주시, 남쪽은 군위군, 북쪽은 안동시와 예천군에 접하고 있다. 전체면적 1,176.6이며, 1907년 비안군이 의성군으로 통합되고, 1914년 다인면이 편입되고 1940년 의성면이 의성읍으로 승격되어 오늘날의 의성군이 발전하여 현재 의성군은 117면이 되었다. 인구는 약6만여명(201711월 기준) 117400리이다.

태백산맥에 속하는 소산맥이어서 험준한 곳은 없고, 동부는 임상이 매우 좋아 울창한 산림과 밭작물이 발달되어 사과, 복숭아, 마늘, 고추, 특용작물재배가 성하고, 서쪽은 지형이 낮고 위천강 유역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미작농업이 발달되어 질 좋은 쌀이 생산된다. 의성의 명산은 금성산과 비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의성 경덕왕릉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의 왕릉, 경덕왕릉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4못 미쳐 금성면 대리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군 중에 조문국 경덕왕릉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도읍지로 하여 존속하다가 185(신라 벌휴왕 2)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문국이 실재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 문헌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능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정면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1725(영조 원년)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왕릉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고, 그후 경덕왕릉보존회가 구성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역은 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여진 비석과 문인석·장명등·상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 경덕왕릉이 발견된 전설에 대하여 *경덕왕릉이 발견된 배경에 대한 신기한 전설이 조선 숙종 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있다.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의 외밭이었다.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사진 : 유시문 기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