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삼년산성(오정산성)

보은의 삼년산성은 보은읍 동쪽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며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대단한 석축산성이다

보은 삼년산성(오정산성)

보은의 삼년산성은 보은읍 동쪽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며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대단한 석축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고 소지왕 8년(486)에 이찬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보은은 지증왕 3년(553) 삼년산군이 되었고 경덕왕 1년(742)에는 삼년군으로 바뀌었다. 이때 삼년산·삼년이라는 지명이 삼년산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거꾸로 먼저 이 지역의 이름이 있고 거기서 산성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삼국사기』에는 성을 다 쌓는 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나중에는 오정산에 있는 산성이라 하여 오정산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보은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보은에는 14개의 성터가 있을 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길목 역할을 했다. 삼년산성은 주변에 있는 청주의 상당산성과 단양의 온달산성 등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이다. 하지만 석축으로 쌓은 이 산성은 산성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산성 중 하나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분정도 도로를 오르면 삼년산성의 바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걷기를 시작하면 된다. 삼년산성은 그 높이가 15m가 넘고 두께도 다른 산성에 2배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성이라고 한다. 산성의 입구인 서문지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곳이다. 일반적으로 성문은 안쪽으로 열리는데 삼년산성의 문은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고 한다. 서문지 앞에는 연못 흔적이 남아 있는데 아미지라 불리며 연못의 뒤 암벽에는 신라의 명필이라 불리는 김생의 글씨가 적혀 있다. 서문지에서 오른쪽으로 걷기를 시작하면 된다.

성곽의 길 아래쪽으로 걷는다. 한쪽 옆으로는 돌들로 쌓인 석축의 벽이 또 한쪽으로는 숲이 자리한 호젓한 길이 이어진다. 성곽 길은 자연스럽게 잘 닦여져 있어 걷기에 순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쾌적하기도 하다. 서문지에서 50분정도를 걸으면 동문지가 나온다. 동문지를 지나게 되면 산성에서 가장 높은 동북치성에 올라설 수 있다.


동북치성으로 가는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삼년산성은 길지 않은 길이지만 굴곡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이 크지 않은 성이 천혜의 요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기에는 무난한 길이다.

동북치성을 거쳐 서북치성을 지나 서문지로 돌아오면 걷기를 마친다.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있다. 청주에서 보은으로 난 25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보은읍 초입에 있는 후평 사거리에 닿게 된다. 후평 사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 방면으로 2.55㎞ 가면 길 오른쪽에 상주리 버스정류장과 함께 보은상고로 난 마을길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약 250m쯤 가면 길 왼쪽에 보은상고가 나오고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갈래길 모두 삼년산성으로 갈 수 있으나 왼쪽 길은 마을 안을 지나는 길이라 좁고 복잡하다.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약 850m 가면 보은상고 앞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마을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약 150m 가면 삼년산성이다.


고려시대 석불의 전형적인 친근함을 보여주는 보은사 석조 여래입상.

무너진 성벽 길 중간에 주황색 양철지붕을 얹은 보은사 사찰을 들린다. 100년 조금 넘은 사찰이지만 본당 옆 미륵전에 모셔진 고려시대 보은사 석조여래입상은 깨진 불두와 불신을 붙혀 놓은 것으로 전체적으로 어색하고 수인의 모습도 정확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통견식 대의와 옷주름은 자연스러운 편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은사는 삼년산성 북문지(北門址) 안쪽에 위치한 사찰로 1902년(광무 6) 박경하(朴鏡荷)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며, 석조 여래입상은 일제강점기 보은읍 대야리 미륵댕이 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보은사 법당에 본존불과 별도로 봉안되어 있으며 목과 허리부분이 훼손되어 현재 3부분을 시멘트로 접합한 상태였으나 전문가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식보다 뜻을 중시 여겼던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 조각 수법이 거칠어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첫인상이 거칠어 보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람을 보거나 불상을 볼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얼굴부터 본다. 이 불상의 두상은 눈코입이 뭉뚝하여 적당히 새겨진 듯 보인다. 가슴 앞에 염주를 들고 돌리는 듯 모습의 손도 큰 공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대충 조각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어색한 불두와 불신을 합쳐 놓은 상태인데 머리부분은 원래의 상을 다듬는 과정에서 변모된 것이라고 한다. 불신에는 통견의 대의를 입고 반복되는 U형의 옷주름이 배 밑 까지 늘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두 손은 가슴으로 모았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3, 4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전법륜인(轉輪法印) 처럼 보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군의 밑으로 발가락이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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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